Read/Nonfiction_비소설

사치스러운 고독의 맛

nitro 2024. 10. 15.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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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치스러운 고독의 맛 / 모리사와 아키오 지음, 박선형 옮김. 샘터(2021).

달걀밥에 대해서는 목청 높여 "일가견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몇 년 전 유명하다는 양계 농가를 취재하면서 달걀에 대한 자료를 숱하게 읽고 연구한 끝에 <히카루의 달걀>이라는 소설을 집필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소설은 궁극의 달걀밥 가게를 열어, 나고 자란 시골 고향 마을을 일으키려는 열정적인 청년에 관한 이야기다. 이 소설을 집필하면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다양한 종류의 달걀밥을 이것저것 수없이 만들어봤다. 얼마나 심하게 파고들었던지, 달걀밥을 주제로 한 강연에도 초청되어 나갔고, 심야 예능 방송에는 달걀밥 전문가로 출연하기도 했다. (중략) 역시 달걀과 밥이란 어떤 식재료와도 궁합이 좋은 팔방미인이다. 어떤 재료를 곁들여도 기본이 워낙 맛있으니 실패란 없다. 대단하지 않은가? 코웃음이 날 정도로 간단한, 누구나 할 수 있는 '한 그릇 요리'이면서도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으니까. - p.27

최근 들어 가장 입에 맞는 것은 고등어 통조림이다. 다만 고등어 통조림은 값과 맛이 정비례한다는 점을 알아둬야 한다. 조금 값이 나가는 고등어 통조림은 얼떨결에 소리를 지르게 될 정도다. "이게 통조림이라고?" 하나에 500엔 이상 나가는 아오모리현 하지노헤시에서 수확한 '하지노헤 앞바다 고등어 통조림'은 적당한 지방을 함유한 동시에 감칠맛이 일품인, 미식의 경지에 이른 제품이다(개인적인 견해다). 평소에 즐겨 먹는 것은 하나에 200엔 정도인 이토식품의 고등어 통조림 시리즈다. - p.42

음료가 곧장 도착했다. '강추'이면서 '화려한 최고의 음료'인 허브티는 히비스커스가 들어간 진홍색의 레드 징거 계열이었다. 드디어 그 최고의 음료를 한 모금 마신다! 그런데, 이.거.슨.무.엇.인.고? 나도 모르게 입에 물고 있던 빨대를 빼고 음료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맛도 향도 아주 맹탕이었다. (중략) 넌지시 볕이 내리쬐는 쪽으로 유리컵을 밀어보았다. 앗, 피었다! 유리컵을 비스듬히 투과한 햇볕이 테이블 위로 동그란 주홍빛을 그리며 살랑살랑 일렁대기 시작했다. 마치 햇볕 속에 핀 한 송이의 히비스커스 같았다. 게다가 얼음과 유리컵이 보기 좋게 빛을 굴절시켜 붉은 꽃 주변을 반짝이며 빛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중략) 얼마나 평온한 시간이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맛도 향도 옅디옅은 허브티를 나름 제대로 즐겼다. -p.50

나는 일단 '이건 실패하지 않겠지' 싶은 메뉴를 세 가지 정도 정해두었다. 그 메뉴는 카레라이스, 라멘, 그리고 파스타다. 이 세 가지 중에서 최근 가장 빠져 있는 메뉴는 파스타다. (중략) 저렴한 가게에서 먹어도 언제나 맛있는 고르곤졸라 치즈 페투치네. 특히 밀가루의 풍미가 제대로 살아있는 생면을 추천한다. 다만 대식가가 아닌데도 어쩐지 양이 늘 부족하게 느껴진다. 양을 추가해도 여전히 미묘하게 부족하다. 그럴 때면 배 속에 어중간한 빈 공간을 남긴 채 좀 서운하고 아쉬운 마음으로 가게를 나선 후 편의점에 들러 삼각김밥 한 개를 사들고 집으로 돌아간다. - p.187

<쓰가루 백년 식당>의 작가, 모리사와 아키오의 에세이 단편집. 거의 일기에 가까운 수필 느낌이라 약간 호들갑스러운 것 같기도 하고, 이 작가 말하는 스타일이 원래 그런 것도 있지만 문장이 길게 늘어지는 부분도 꽤 많이 눈에 띈다. 무엇보다 바로 얼마 전에 읽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능글맞은 아저씨가 술자리에서 인생 경험담 들려주는 듯 술술 읽히던 - 에세이와 비교하자니 뭐랄까 내공의 차이가 느껴진달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부분 (특히 음식 이야기 부분)은 감탄이 나올 정도다. 감탄이 나올 정도로 잘 썼다기보다 감탄이 나올 정도로 비슷한 경험을 한 탓에 느껴지는 동질감 때문이다. 글을 얼마나 잘 쓰는가와는 별개로, 비슷한 부분에서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을 보며 느끼는 동료 의식이 들게 만드는 책.

그나저나 <히카루의 달걀>은 한 번 읽어봐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