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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tch/Concert_공연

브로드웨이 뮤지컬, 비 모어 칠

by nitro 2019. 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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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년 사이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뮤지컬을 꼽는다면 단연 '해밀턴'과 '디어 에반 핸슨'의 양대 산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해밀턴이 미국의 역사라는 흔치 않은 주제를, 현대 음악이라는 새로운 방식으로 풀어나갔기 때문에 각광을 받는다면 디어 에반 핸슨은 청소년층을 대상으로 외로움과 소통에 대한 진지한 담론을 형성했다는 점에서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인정받는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 후로 수 많은 작품들이 해밀턴이나 디어 에반 핸슨을 뛰어넘는 것을 목표로 야심차게 개봉했음에도 불구하고 뛰어넘기는 커녕 간신히 따라잡기에도 벅찬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의미에서 '비 모어 칠(Be more chill)'은 청소년들의 성장 드라마를 다루면서도 디어 에반 핸슨과는 다른 방법으로 풀어나가며 나름대로의 매력적인 영역을 구축했다는 점에서 눈여겨 볼 만 하다. 원작 소설을 뮤지컬로 재탄생 시켰는데 원래는 2015년경 뉴저지에서 처음 개봉하고 오프 브로드웨이로 진출했다가 점점 입소문을 타고 인기가 많아지면서 드디어 2019년 2월에 브로드웨이에 입성한 인기작이다.  

찌질하고 인기없는 소심남이 일본에서 밀수입된 알약 모양의 슈퍼 컴퓨터를 삼키게 되고, 인기남이 되어 짝사랑하는 여자아이를 차지하기 위해 컴퓨터가 시키는 대로 하다가 진정한 우정과 인기와 사랑이 어떤 것인지 깨닫게 되는 그런 내용이 대략의 줄거리. 여러모로 디어 에반 핸슨과 비교하는 사람이 많은데,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비교 대상이 좀 잘못된 것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인기 없는 고등학생이 사랑받기 위해 부적절한 방법을 동원한 끝에 결국 진실을 알게 된다는 커다란 얼개는 비슷하지만, 비 모어 칠의 주인공인 제레미가 겪은 외로움은 에반 핸슨이 겪었던 고독과는 그 색깔이나 깊이가 다르기 때문이다. 친구와 비디오 게임이나 하는 게 유일한 사회생활인 찐따(nerd)와 우울증 약 먹으며 자살 시도를 했던 외톨이는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랄까. 오히려 전체적인 작품의 색깔은 민걸즈(Mean girls, 퀸카로 살아남는 법)과 비슷한 부분이 많다.   

전반적인 분위기는 굉장히 밝고 유쾌하며 코믹하다. 인기를 얻기 위한 해결책으로 등장한 것이 컴퓨터 알약이라는 점에서부터 진지함은 물건너 갔다고 보는게 맞다. 하지만 그 가벼움이 전혀 어색하거나 불편하지 않은 게 비 모어 칠의 장점. 어찌 생각하면 에반 핸슨이나 민걸즈가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함에도 불구하고 너무 무거운 것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니까.

등장인물을 통틀어도 열 명 정도밖에 안되는 소규모 뮤지컬이라 엄청나게 화려하거나 규모가 웅장한 무대를 기대했다면 실망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매 장면마다 사람들 웃기는 요소가 많은데다가 무엇보다도 노래가 좋은 게 큰 장점. 뮤지컬 넘버를 듣다 보면 어떤 경우에는 서술을 이어나가기 위해 가사에 억지로 곡을 붙인 느낌이 드는 경우가 많은데 비 모어 칠은 테마곡인 Be more chill은 물론이고 전체 노래 중에 절반 이상이 귀에 착착 달라붙는다. 가볍게 웃으면서 중독성 강한 노래를 감상하다 보면 어느 새 막이 내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결말 부분에서는 '진짜 인간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만드는 것 역시 매력적인 요소.

다만 아쉬운 점이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캐스팅. 주인공인 제레미의 캐스팅이 디어 에반 핸슨의 제러드 역을 맡았던 윌 로렌드(Will Roland)인데, 아직 전작의 분위기에 좀 매몰된 느낌이 든다. 브로드웨이 오기 전 오리지널 캐스팅인 윌 코널리(Will Connolly)의 노래를 들어 보면 가벼우면서도 허당끼가 있고 그러면서도 순박한 진심이 느껴지는 찐따 이미지가 목소리만 들어도 절로 그려진다. 반면 윌 로렌드는 왠지 절박하면서도 호소하는 분위기의 노래라는 느낌. 물론 가사나 극의 분위기가 워낙 가볍고 코믹스러우니 (첫 노래의 시작이 "난 지금 포르노 동영상 다운받길 기다리는 중이야"다.) 크게 방해가 되는 수준은 아니고, 사람에 따라서는 이 목소리가 더 취향일 수도 있겠지만. 양자 컴퓨터인 스큅의 경우에는 오히려 반대다. 오리지널 캐스팅에서는 좀 중립적이고 (컴퓨터니까) 비인간적이며 (컴퓨터니까) 주인공을 깔보는 듯한 (슈퍼 컴퓨터니까) 분위기였는데 브로드웨이에서는 좀 심하게 잘난척하는 연예인 멘토 느낌이다.  

캐스팅 말고 또 다른 문제는 브로드웨이로 넘어오면서 편곡을 한 넘버가 몇 개 있는데 이게 영 걸쩍지근하다는 사실. 이 역시 엄청나게 뜯어고친 건 아니고 몇몇 부분에서 소소하게 변화를 줬는데, 뭐 대단히 좋아진 것도 아니고 어떤 노래는 원곡이 더 낫지 않나 싶기도 하다. 청소년층을 확고한 공략 대상으로 잡고 집중적으로 어필하는 게 프로모션 전략이라던데 그것 때문에 좀 더 가벼운 분위기로 고친 건가 하는 생각에 이해는 되지만 그래도 오리지널 넘버가 더 내 취향이었는데 하는 아쉬움은 어쩔 수가 없다.

하지만 아쉬운 건 아쉬운 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볍고 재미있는 것 좋아하는 내 취향에 잘 맞는 스토리와 경쾌한 음악을 충분히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오래간만에 제 값 다 주고 구입한 티켓이 하나도 안 아까웠던 뮤지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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