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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무협&판타지

판타지 소설 리뷰: 아포칼립스의 고인물

by nitro 2020. 9.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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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물과 아포칼립스물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상당히 다른 노선을 걷는 장르 소설이다.

헌터물이라면 어딘가로 연결되는 게이트 오픈 - 괴물 쏟아짐 - 각성을 한 주인공이 괴물을 사냥함 - 괴물 뿐만이 아니라 다른 인간 및 단체들과 투닥거리며 성장하는 게 기본 경로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문명 사회가 살아있다는 것. 왠지는 모르겠지만 괴물을 사냥하면 마정석, 코어, 에센스 등등의 이름을 단 정체 불명의 자원이 나오고 그 자원은 왠지는 모르겠지만 매우 가치가 높으며, 더 강한 괴수를 사냥할수록 더 가치가 높은 마정석이 나온다.

따라서 주인공은 단순히 능력치를 올리면서 본인의 힘을 강화시켜 헌터들 사이에서 갑이 될 뿐 아니라, 사냥을 통해 얻는 돈을 이용해 아직도 제대로 돌아가는 사회 시스템에서도 갑이 되는, 다시 말해 일반 현대 판타지물의 재벌 환생과 비슷한 포지션도 동시에 가질 수 있다.

반면에 아포칼립스물은 괴물이 나오는 것은 헌터물과 같지만 일단 현대 사회를 왕창 부숴놓고 시작한다. 본인의 능력치를 올려 힘을 키우는 것은 비슷하지만 이미 붕괴된 사회 시스템에서는 주인공이 아무리 뛰어난 힘이 있어도 스포츠카를 사거나 한강 전망의 초호화 아파트를 구입하는 등의 사치를 부릴 수가 없다. 그렇기에 아포칼립스물은 주인공이 돈을 펑펑 쓰는 것보다는 어떻게 물자를 조달하고 살아남는지 서바이벌 측면에서 바라보는 시각이 강하다.

그리고 이 소설, "아포칼립스의 고인물"은 헌터물과 아포칼립스물에 게임 판타지까지 섞어놓은, 흔치 않은 배경을 두고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주인공이 플레이하던 망겜이 어느 날 갑자기 현실로 변하고, 별로 플레이하는 사람도 많지 않던 그 게임을 얼마나 오래 플레이했는지, 그리고 게임 지식을 얼마나 많이 갖고있는지가 중요해진다.

게다가 "철사병"이라는 정체불명의 현상으로 인해 현대 문명의 금속들이 모조리 가루가 되어버리면서 철근이 사라진 집들이 무너지고, 총기도 사라지고, 서바이벌의 기본템이었던 통조림들은 모조리 쓰레기로 변해버린다.

사람들은 곳곳에서 나타나는 괴물들과 싸우는 한 편, 한정된 물자를 놓고 다른 사람들과도 전투를 벌여야 하고

여기에 한 술 더 떠 일정 수 이상의 인원이 모이면 터져나오는 좀비 떼거리라던가, 사람을 죽이면 살인자로서 받게 되는 버프와 패널티 등이 기묘한 세력 구도를 형성하게 만든다.

이 모든 난장판 속에서 가장 오랫동안 게임을 했던 고인물, "김밥조아"는 차근차근 준비를 끝마치고 자신만의 쉘터에 온갖 물자를 비축한것도 모자라 미곡 창고, 대형 마트, 군부대 등 가는 곳마다 털어먹으며 재산을 쌓아놓는다.

시원시원하게 질러가며 말 안듣는 놈 줘패고 레벨 업 술술 해 가며 종횡무진하는 다른 소설의 주인공들과는 달리 다람쥐 도토리 모으듯 죽어라 물자만 모으는 주인공이 좀 소심해 보이기는 하지만 원래 게임 플레이 유형이 그랬기 때문에 어느 정도 수긍은 간다.

무엇보다도 하렘물의 주인공도 아니고 고자도 아니라는 게 상당히 현실적.

이렇게 요약 해 놓으면 도대체 뭔 소리인지 이해가 되질 않는데, 실제로도 읽다 보면 이게 도대체 뭔 이야기인가 싶은 분위기이기도 하다.

게임 판타지라고 보기엔 온 세상이 무너져 내리고 있는 중이고, 그렇다고 세계 멸망물이라고 보기엔 사람끼리 죽이지도 못하는 시스템에서 제정신이 아닌 듯한 게임 속 고인물들이 펼치는 엽기적인 행각이 분위기를 띄운다. 헌터물이라고 보기엔 몬스터를 잡는 게 별로 부각이 안되고, 그렇다고 헌터물이 아니라고 하기엔 몹을 잡아 올리는 스테이터스와 스킬들을 무시할 수 없는 현실.

필력이 엄청나게 무시무시한 것도 아니고, 글의 전개가 탄탄하다거나 긴장감이 고조되며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것도 아니다.

캐릭터가 독특하기는 해도 빠져나오지 못할 매력이 있는 건 아니고, 뒷이야기가 궁금해 미칠 정도로 흡입력이 있는 것도 아닌 소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볍게 보며 시간 때우기에 최적화된 소설이라 글을 대충대충 읽어도 어지간히 볼 만하다는 게 장점인 듯 하다.

굉장히 잘 쓴 소설은 읽고 나서 피곤하다거나 다음화가 궁금해서 갈증난다거나 할 정도인데

이 소설은 별로 힘들이지 않고 술술 읽히면서 회당 구독료 100원이 아깝지는 않은 수준은 되니까.

예전에도 말했듯이 분식집 김밥과 고급 레스토랑 음식은 서로 추구하는 바가 다르고, 그렇기 때문에 그 둘을 같은 기준으로 평가해서는 안된다.

이는 소설도 마찬가지여서 '아포칼립스의 고인물'을 문학적으로 평가한다면 혹평을 피할 수 없겠지만

머리 비우고 가볍게 즐길만한 양판소 본연의 목적에 충실하다는 점에서는 상당히 넓은 독자층에게 나쁘지 않은 평을 받을 수 있을 듯.

다만 한 가지 걱정이라면 이렇게 가벼운 소설들은 끝맺음 마저도 가볍기 때문에 후반부 가면서 평가 왕창 떨어지는 일이 자주 발생한다는 거.

그래도 아직까지는 읽던 관성에 힘입어 계속 읽게 되는 소설이다.

총평: ★★★☆☆ 흔하게 볼 수 있는 양판소. 그래도 생각없이 기존의 세계관을 답습하는 상당수의 양판소에 비하면 나름 독특한 설정과 매력이 있는데다가 가볍게 술술 읽힌다는 게 나름의 장점. 예를 들어 잘 쓴 소설이 직접 게임 플레이 하는 느낌이라면 이 소설은 남이 게임 플레이하는 방송 영상을 보는 느낌이랄까. 결말까지 이 퀄리티가 계속 이어질지가 관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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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그래도 위태위태했는데, 이세계 이종족들이 등장하면서 기존의 장점은 다 사라지고 단점은 부각되어버렸다.

'왜 지금 와서 이런 애들이?'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뜬금포랄까.

몰입도가 확 깨지면서 읽던 관성을 멈춰버린 계기가 된 듯.

완결이 나긴 했는데 초반에 비하면 참신성이나 글의 짜임새 면에서 퀄리티가 확 떨어지는 게 눈에 보인다.

총평: ★☆☆☆☆ 전형적인 용두사미식 결말. 작가가 (혹은 이 소설이) 소화할 수 있는 것 이상을 억지로 섞어넣다가 망한 케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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