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이라도 글을 써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괜찮은 글 한편 쓴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 글의 길이가 책 몇 권 분량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용두사미라는 말에 걸맞게 흐지부지 끝을 맺고,
또 그 이상으로 많은 이야기들이 첫 한권 분량을 채우기도 전에 무너지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마음에 드는 소설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고, 그렇게 마음에 드는 소설을 여러 편 쓰는 작가를 만나는 것은 그야말로 행운에 가깝다.
게다가 선호작을 수백개씩 찍어놓는 욕심은 있으면서 선호작 쪽지를 일일히 확인하는 부지런함은 없는 나같은 인간에게는 어쩌다 마음에 드는 작가가 후속작을 내도 모른 채 넘어가는 일도 부지기수다.
그래서 마음에 드는 작가가 연재하는 신작을, 운좋게도 유료화 전부터 읽고 있으면 왠지 길 가다 돈 주운 느낌도 든다.
이 소설, 천재 흑마법사 역시 마찬가지.
호흡을 길게 잡고 이어가는 '강과 먼지의 왕자'나, 호흡을 짧게 가는 '도시던전 연대기', 그리고 독자들 입맛에 맞게 막나가는 '쥐쟁이 챔피언'에 이르기까지 전작을 모두 재미있게 읽고, 또 읽는 중이기에 이번 작품 역시 즐겁게 따라가는 중.
고아원에서 자라 광산에서 일하며 밑바닥 인생을 전전하던 올리버. (...트위스트?)
영혼 한 구석이 망가진 것인지 감정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지만, 그 대신 타인의 감정을 파악하고 그 힘을 뽑아내는 데 탁월한 재능을 보인다.
그 재능을 눈여겨 본 흑마법사에게 발탁되어 제자로 받아들여지고, 흑마법을 이용해 타인의 감정을 가공하여 마약을 만들어 파는 조셉 패밀리에서 일하기 시작한다.
요즘 꽤나 유행을 타는 "마법과 스팀펑크가 섞인 세상에서 밑바닥부터 기어올라가는 인생 성공담"의 루트를 타고 있는데, 주인공이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이코패스라는 점이 신선하다.
많은 소설들이 사이코패스 주인공을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쿨한 척 하는 찐따 수준이라면 이 소설의 주인공은 '감정이 결여되고 자신의 이익을 냉혹하게 객관적으로 계산하는 사람의 심리'가 그럴듯하게 묘사된다.
올리버도 시험관을 꺼내며 물었다.
"아, 결국, 싸우는 건가요?"
"..."
놀랍게도 앤서니와 도미니크는 아까 전과 달리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앤서니가 물었다.
"... 왜? 우리가 싸울 거라고 하면 싸울 건가?"
"싫긴 하지만... 어쩔 수 없죠."
"하... 싫긴 하지만?"
"예. 사람 죽이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뭣보다 싸우면 공부하는 시간도 낭비되고... 죄송하지만 평화로운 방법은 없을까요?"
생과 사가 오가기 직전의 상황. 그럼에도 올리버의 발언은 그와 상당히 벌어져 있었다. 마치 목숨을 건 싸움이 자신과 상관없다는 듯한 말투였는데.
더욱 소름이 끼치는 건 이것이 알량한 자존심이나 잘못된 오만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는 거였다.
인간으로서 뭔가가 심각하게 결여된 성격. 그럼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재능.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흑마법(과 미지의 감정)에 대한 갈망. 이렇게 놓고 보면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에 나오는 주인공, 그르누이와도 꽤 비슷한 느낌이다.
다만 특색있는 주인공에 비해 아직까지 소설의 전개 자체는 그렇게 대단한 사건이 일어나지는 않고 있다.
감정선이라는 게 없는 주인공이다보니 인간 관계도 굉장히 사무적이고 흐릿하고, 그러다보니 누가 죽어나가도 이상할 게 없는, 뭔가 여러가지 사건이 일어났는데도 아직 백지만 놓여있는 느낌.
임신한 고블린을 구워먹는 쥐쟁이가 주인공이었던 전작에 비하면 꽤나 얌전한 출발인 셈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더 기대가 된다. 소설 한 권 분량을 털어서 최고급 백지를 깔아놨으니 그 위에 앞으로 어떤 그림을 그려나갈지 흥미진진하달까.
이 작가의 전작으로 미루어 볼 때, 뭔가 제대로 이야기를 쌓아 올릴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일 듯 하다.
물론 탑티어 작가들도 쓰다보면 망작이 나오는 판에 '절대'로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이미 '강과 먼지의 왕자'에서 심정적 부채를 안고 있으니 혹시라도 유료화 이후 재미없어지면 강먼왕에 낼 돈 여기에 낸다고 생각하고 보지 뭐, 라는게 솔직한 심정.
총평: ★★★☆☆ 아직까지는 특별히 평가할 것도 없이 스무스하게 도입부를 지나는 중. 꽤나 독특한 주인공과 감정을 다루는 흑마법 체계가 흥미롭다. 중반 넘어가며 진가를 발휘할 것인가가 관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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