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사가 너무 많다 / 렉스 스타우트 지음, 이원열 옮김. 문학동네 (1993)
이 소설을 읽고 난 후, 내가 가장 좋아하는 탐정은 네로 울프가 되었다.
의자에 앉아 주어진 정보만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정통파 탐정이지만 전속 요리사를 둘 정도로 미식을 좋아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오만하고 게으른데다 남녀차별주의자라는 성격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만들어내는 독특한 캐릭터가 매력적이다.
그의 조수, 아치 굿윈이 고전적인 왓슨의 역할과 더불어 주로 몸 쓰는 일을 하면서도 그의 고용주와 끝없이 쏟아내는 만담 역시 재미있는 볼거리.
곳곳에서 끼어드는 울프의 (그리고 작가의) 미식관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젊은 날의 저는 오스트리아 정부에서 비밀 임무를 받고 스페인에 가 있었죠. 어떤 남자의 흔적을 따라가다 보니 피게레스까지 가게 되었고, 저녁 식사도 못 한 채 밤 10시에 어느 광장 구석의 작은 여관에 들어가 음식을 달라고 했습니다. 여주인은 별 음식이 없다고 하며, 하우스 와인, 빵, 소시지 한 접시를 내오더군요.”
울프는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선생님, 로마 장군 루클루스도 그런 소시지는 맛보지 못했습니다. 미식 예찬을 쓴 브리야 사바랭도요. 니콜라스 푸케의 요리사였던 바텔이나 요리의 제왕이라는 에스코피에 역시 그런 것은 절대 만들지 못했습니다. 저는 여주인에게 어디서 구했느냐고 물었죠. 아들이 만들었다고 하더군요. 아들의 이름을 물었습니다. 제로메 베린이라더군요. 저는 소시지를 세 접시 더 먹고, 다음 날 아침 그 여관에서 아들을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뒤쫓던 자가 한 시간 후에 잽싸게 포트 벵드레로 넘어가 배를 탔기 때문에 그를 따라가야 했습니다. 결국 다시는 스페인에 가지 못했어요. 하지만 아직도 눈을 감으면 그 소시지 맛을 느낄 수 있어요.”
울프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한숨을 쉬었다. 베린은 찡그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듣기 좋은 이야기군요, 울프 씨. 진정한 찬사입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물론 소시스 미뉘이(한밤의 소시지)는…”
“그때는 소시스 미뉘이라는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스페인의 작은 마을의 작은 여관에서 직접 만든 소시지 요리에 불과했죠. 제가 말하려는 요점이 바로 그겁니다. 저는 어렸습니다. 그땐 고급 요리가 어떤 것인지 잘 몰랐고요. 찾아갔던 그 식당은 전혀 이름없는 곳이었죠. 그런데도 저는 그 소시지가 진정한 예술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선명히 기억합니다. 처음 한 개를 먹었을 때는 혹시 재료들을 대충 섞다가 우연히 이런 소시지가 한 개 나온 것은 아닐까 의심하면서 걱정했어요. 하지만 다른 소시지들도 다 똑같았고, 추가로 먹은 세 접시의 소시지 모두 마찬가지였습니다. 천재적이었어요. 그곳에서 제 미각은 소시지에 환호했습니다. 저는 제로메 베린이 유명하고 소시스 미뉘이가 그의 걸작이기 때문에 산레모의 코리도나까지 차를 몰고 점심을 먹으러 가는 사람은 아닙니다. 위대한 음식이라는 걸 알아차리기 위해 명성에 기댈 필요가 없죠. 제가 만약 그렇게 먼 거리를 간다면, 그건 잘난 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먹기 위해서일 겁니다. (중략) 어쩐지 제가 언짢게 만든 모양입니다. 부탁을 하기 위해서 한 이야기인데 솜씨가 서툴렀나 봅니다. 이십 년간 소시지 조리법을 공개해 달라는 요청을 계속 거절하셨던 것은 압니다. 주방장은 전 인류보다는 자기 자신을 먼저 생각해야 하니까요.”
“생선은 레옹 블랑이 맡았다. 길이 십오 센티미터 정도 되는 작은 민물 송어가 한 사람당 네마리씩 나왔고 케이퍼가 든 밝은 갈색 소스가 곁들여져 있었다. 레몬도 아니고 내가 아는 그 어떤 식초의 맛도 아닌 새콤한 맛이 났다. 사람들이 무엇을 넣었느냐고 물어도 블랑은 씩 웃으며 아직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고만 할 뿐이었다. 리젯 푸티와 나만 빼고 모두 송어의 머리와 뼈까지 전부 먹었다. 내 오른쪽에 앉은 콘스탄자 베린도 다 먹었다. 내가 살을 발라내는 것을 보자 그녀는 미소 지으며 당신은 절대 미식가가 되지 못할 거라고 했다. 내가 물고기의 얼굴을 먹지 않는 것은 애완 금붕어 때문에 감상적이 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우리 삶이란 인간다움들로 지탱되는데 그중에는 개와는 달리 품위 있는 지성으로 식욕을 조절하는 능력도 있다네. 사람은 시체를 먹어 치우거나, 황혼에서 새벽까지 언덕에서 울부짖지 않아. 사람은 잘 조리된 음식을 먹고, 구할 수 있을 때 먹고, 신중하게 먹을 양을 정하지.” (심금을 울리는 명대사. 130~160kg이 넘는 거구의 사내가 할 말이냐! 싶긴 하지만서도.)
“다른 상황이었다면 제가 최고급 요리에 대한 미국의 기여를 논하는 것을 들으시며 여러분은, 최소한 여러분 중 몇 분은 유익하고 즐거운 경험을 하셨을 겁니다. 그리고 저는 여러분에게 그러한 기여가 무시할 것이 아니며 빈약하지도 않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바람직했을 겁니다. 이 주제로 발표를 해 달라는 초대를 받았을 때는 저는 무척이나 기뻤고 으쓱해졌습니다만, 연설을 할 시점에서 이런 연설이 얼마나 불필요하게 될지는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음식 이야기를 하는 것은 즐겁습니다만, 먹는 것은 그보다 한없이 더 즐겁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먹은 뒤입니다. (중략) 제가 최상급 미국 요리 몇 개를 묘사하고 찬사를 보낼 수는 있겠지만, 바로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는 테이블을 가리켰다.
“...여기에 있다가…”
그는 부드러운 손바닥으로 조심스레 배를 두드렸다.
“...이제는 여기에 있는 굴과 테라핀(거북이 요리)과 칠면조를 능가할 수는 없습니다.”
안타까운 건 우리나라에 번역된 네로 울프 시리즈가 세 권밖에 없다는 점이고, 그나마 불행중 다행인건 영문판은 아마존에서 전자책으로 구할 수 있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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