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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tch/Concert_공연

브로드웨이 뮤지컬, 팬텀 오브 오페라

by nitro 2022.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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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진건의 "피아노"라는 소설에서는 화목한 가정을 상징하는 소품으로 피아노가 등장한다.

남편과 아내 둘 다 피아노라고는 한 번도 쳐 본 적 없으면서 그럴듯한 집안 풍경에는 피아노가 배경으로 자리잡아야 한다는 일념에 구입한 피아노.

그리고 1980년대 어지간히 사는 집에서는 오디오 시스템이 그런 역할을 하곤 했다.

카세트 플레이어, 라디오, CD 플레이어, 턴테이블이 세트로 차곡차곡 쌓여있는 모습은 TV 옆의 허전한 공간을 채워주는 필수품이었달까.

하지만 그 빠방한 음향기기를 채워줄 음반들은 빈약하기 그지 없는 게 또 그 당시의 실상이었다.

세일즈맨이 서비스로 끼워주고 간 클래식 음반 약간을 제외하면 대다수가 뽕짝이나 트로트, 그것도 구루마(손수레가 맞는 명칭이지만, 불법복제 음악 테이프는 손수레에서 팔지는 않았다. 구루마나 리어카에 쌓아두고 팔았을 뿐)에서 불법복제로 판매하던 테이프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쌓여있는 테이프 사이로, 마치 민속 오일장터에서 금발 벽안의 외국인이 팝콘을 튀겨 파는 것마냥 이질적인 분위기를 풍기며 존재감을 자랑하는 음반이 있었으니

당시 꼬꼬마 국민학생이었던 내가 처음으로 접했던 "오페라의 유령" 카세트 녹음본이었다.

검은색의 고급스러운 상자 안에 딱 두 매 들어있던 카세트 테이프. 

그리고 그 검은색을 배경으로 하얀 가면과 장미꽃 한 송이가 그려진 그림이 왠지 기괴하면서도 사람을 끌어들이는 듯한 매력이 있었다.

유치원 때부터 영어공부를 시작하는 초등학생들과는 달리, 매일같이 날아오는 학습지 정도만 끝내면 별다른 숙제가 없었던 국민학생이었던지라

오디오 세트의 버튼을 이것저것 누르면서 우주 조종사 놀이를 하다가 질릴 때면 카세트 테이프를 넣고 타이틀곡인 오페라의 유령을 주구장창 돌려 듣곤 했다.

어찌나 그 곡이 마음에 들었던지 학교 음악 시간에 좋아하는 노래가 무엇인지 발표하는 자리에 당당하게 "오페라를 좋아합니다! 오페라의 유령이요!"라고 말할 정도였고,

선생님은 "그건 오페라가 아니라 뮤지컬이란다"라고 지적하는 대신 "참 좋은 취미를 갖고 있구나"라는 칭찬을 했다.

나는 아직도 그 칭찬이 자라나는 꿈나무의 용기를 북돋워주기 위한 배려였는지, 아니면 교과서 외의 음악 세계에 대해서는 무지했던 부족한 소양의 산물이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다 컴퓨터 게임으로 등장했던 오페라의 유령을 보면서 '어, 나 저거 아는데!'라는 기쁨에 플레이 해 보고, 

나중에는 영화로 리메이크 된 버전을 보면서 그제서야 가사의 의미를 알게 되며 '저 노래를 실제로 공연장에서 들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국내 초연 당시에는 군대에 묶여 그런 게 있는지도 모르고 지나갔고, 미국 온 후 몇 년간은 유학생활에 적응하느라 바빠서 뮤지컬은 꿈도 못 꾸는 일상이었다.

그러다가 뉴욕 옆동네로 이사 오고, 브로드웨이가 한 시간 거리로 가까워지면서 오랫동안 미루어왔던 꿈의 공연을 드디어 관람할 수 있었다.

곳곳에 붙어있는 팬텀의 가면은 마치 놀이동산 온 기분을 느끼게 했고, 공연이 시작하고 천장으로 올라가는 샹들리에를 보면서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오랜 기다림 끝에, 마침내 감격의 눈물을 한 방울 흘리며 듣게 된, 팬텀과 크리스틴의 노래.

하지만 다 듣고 나올 무렵에는 뭔가 부족한 점이,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느껴졌다.

기대가 너무 컸다기 보다는, 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돌려 들었던 카세트에 익숙해진 귀가 너무나도 까다로운 기준을 제시했기 때문이랄까.

테이프에 녹음된 런던 공연 오리지널 캐스팅의 포스에 비하면 브로드웨이 극장에서 주는 현장감의 빛이 바랬다.

그도 그럴 것이 앤드류 로이드 웨버가 이 뮤지컬을 만들면서 자신의 아내였던 사라 브라이트만을 염두에 두고 크리스틴 다에라는 캐릭터를 만들어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 아닐까.

많은 사람들이 기술적인 측면에서 이 뮤지컬이 갖는 어려움을 강조하곤 하다. 특히 4옥타브 미까지 올라가는 클라이막스 부분은 가수들이 성량 뽐내는 데 쓰이는 단골 메뉴.

하지만 그보다는 두 주연 배우, 팬텀과 크리스틴이 갖는 캐릭터성이야말로 이 뮤지컬의 캐스팅 난이도가 급상승하는 원인일 듯 하다.

요즘 배경으로 풀어서 이야기하면 소규모 엔터테인먼트 회사 사장이 아이돌 가수를 죽자살자 가르쳐가며 연심을 키워나가는데 정작 성공하니까 그 가수는 옛 애인을 따라가는 그런 내용.

초반부는 "넌 나만 믿고 따라와. 넌 내꺼야!"라고 휘어잡는 팬텀과 "팬텀이 내 마음 속에 있네"라며 갸냘프게 따라가는 크리스틴이었다면

후반부는 이런 입장이 역전되면서 팬텀이 아름다운 목소리를, 크리스틴이 힘있는 노래를 불러야 하는, 가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2인 1역 하면 안되냐는 비명이 절로 나오는 연출.

나는 아직도 사라 브라이트만 특유의, 그 초콜렛이 녹아 흘러내리는 듯한 목소리야말로 최고의 크리스틴이라고 믿는다.

반면 팬텀 역할로 등장했던 제임스 바버는 목소리가 너무 아름다운 게 문제. 우리나라에서는 "두 도시 이야기"로 유명한 배우인데, 그 말랑말랑하게 호소하는 듯한 목소리가 전반부를 커버하기에는 좀 약한 느낌이랄까.

뭐, 그래도 라민 카림루나 마이클 크로포드에 비하면 조금, 그야말로 아주 조금 부족한 느낌이라 팬텀만 떼놓고 보면 크게 문제는 없는데...

이게 크리스틴 역의 줄리아 우딘과 영 상성이 맞지 않는다는게 진짜 문제였다.

아무래도 타이틀 곡의 음역대가 음역대인 만큼 굉장히 파워풀한 목소리가 나오는데, 이게 조절이 제대로 안되면서 팬텀을 완전 잡아먹는 느낌.

"난 팬텀에게 끌려다니며 그의 음악을 노래하는 가련한 주인공"이라는 느낌이 아니라 "내 마음 속에 팬텀 있다. 내 마음 알지? 까불면 죽는다?"라는 여장부 분위기.

전반적으로 보면 훌륭한 공연이었고, 한 발자국 건너서 간접적으로 듣던 노래들을 직접 눈으로 보고 들었다는 점에서 불만은 없다.

이제 와서 사라 브라이트만과 마이클 크로포드의 공연을 직접 못 본다고 아쉬워 하는 건 이미 멸종된 공룡을 직접 못 봐서 아쉽다는 것과 다름 없으니까.

워낙 좋아하는 뮤지컬이기에, 그리고 개인적으로 뮤지컬 단체 합창 최고봉으로 꼽는 Masquerade가 있기에 

그 약간의 모자람을 감수하고서라도 기회만 된다면 몇 번은 더 볼테지만 그래도 그 끝에 한자락 걸린 아쉬움만은 어쩔 수 없을 듯 하다.  

* 예전에 브로드웨이에서 보고 난 후 적은 글인데, 이번에 팬텀 오브 오페라가 뉴욕에서 코로나 여파로 결국 막을 내린다는 뉴스를 보고 한 번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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