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 소설의 시초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1세대 판타지 소설 그 어드메쯤에 TRPG라는 거대한 역사를 만나게 된다.
게임 룰에 충실히 따르면서도 지도를 그리고 던전 설계도를 짠 GM의 의도를 엿먹이는 재미로 살아가던 플레이어들의 기록은 수많은 판타지 소설과 게임 시스템에서 그 명맥을 이어간다. (최근의 사례로는 발더스 게이트3가 있다)
턴제 기반의 RPG는 세계관과 그 법칙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적용하느냐에 따라 그 능력이 좌우되며, 먼치킨 캐릭터가 아니더라도 머리를 잘 쓰기만 하면 충분히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다.
다만 이런 류의 소설이 성공하기란 쉽지 않은데 독자에게 충분한 설득력을 보여주면서도 흥미진진한 모험이 이어질 수 있도록 세밀한 설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폭이 5미터 쯤 되는 통로에 나란히 서있다.
벽, 나, 예르닐, 벽.
벽은 중요하다. 미궁 1층 함정에는 벽에서 흉기가 튀어나오는 게 많기 때문이다.
인간의 보행 속도를 계산해볼 때, 함정을 밟은 곳으로부터 1미터 전후가 주된 피격 범위다.
천만다행히도 '눈알을 굴리는 것'은 행동력을 소모하지 않는다.
나는 예르닐 쪽 벽을 필사적으로 탐색했다. 그곳에는 구멍이 없었다.
창이나 화살같은 게 튀어나오는 분출구 말이다.
그럼 내 쪽에는? 내 왼쪽의 벽에서 뭔가가 튀어나올 수 있는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고개를 예르닐 쪽으로 틀어버린 채 모래시계가 발동된 이 상태에선 내 왼쪽을 볼 수 없다.
[48]
벌써 10초 이상 흘렀다.
'행동력을 쓰자'
물론 행동력이 아깝긴 하지만, 시간이 더 아깝다. 나는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눈알을 끝까지 굴렸다.
[행동력 ■■■□]
인간의 시야각은 수평으로 약 200도 정도다. 물론 좌우 끝에 대한 식별 능력은 정면에 비해 크게 뒤쳐진다.
하지만 내가 찾는게 벽에 뚫려있는 2센티미터 지름의 구멍들이라면, 러프하게 식별되어도 알 수 있다.
[행동력 ■■□□]
고개를 30도 정도 돌리자 행동력이 2점 날아갔다. 그리고 내 왼쪽 벽에 대한 정보를 파악했다.
'구멍은 없다.'
이 함정은 벽에서 튀어나오는 종류의 함정이 아니다. (중략)
특수 이벤트가 발생하면 저절로 발동되는 '턴제의 모래시계'. 제한된 시간동안 생각할 수 있으며, 행동력을 소모하여 특정 행동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주인공 케일럽은, 비록 지금은 내세울 것 전혀 없는 마법 대학의 노예로 미궁에 던져저서 말 그대로 바닥부터 기어올라와야 하는 입장이다. 하지만 그 속알맹이는 이 세상 '미궁의 심연' RPG 게임을 온갖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정복하고 마지막으로 '개발자 난이도'에 도전하던 고인물이었던 것.
보통의 판타지 소설처럼 게임 속에 숨겨진 히든 피스와 캐릭터들을 발굴해내며 급속도로 성장하는 것은 같다. 하지만 그 과정이 마치 TRPG 게임하듯 재미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미궁 1층에서 내가 경험해본 바닥 함의 종류를 머릿속에 나열해본다.
1번. 솟아오르는 송곳 함정.
송곳이 예르닐의 발바닥부터 발등까지 수직으로 뚫고나와 아작 내버릴 것이다. 내가 다치진 않겠지만 그녀는 제대로 걷기가 힘들어질 것이다.
2번. 폭발하는 쇠못 함정.
함정을 밟은 그녀의 왼발 뿐 아니라 하반신 전체, 그리고 왼편에 서있는 내 오른쪽 다리 옆면이 전부 걸레짝이 되어버릴 공산이 크다. 내게도 큰 부상이고 그녀에게도 치명상이다.
3번. 가스 함정.
밑에서부터 독가스 또는 수면가스가 분출되어 우리를 쓰러뜨릴 것이다. 어느쪽이든 결국 몬스터의 밥으로 끝나는 엔딩이다.
4번. 낙하 함정.
바닥이 푹 꺼져서 미궁 2층으로 추락하는 것인데, 이 케이스라면 우리에겐 그야말로 일말의 생존 희망도 없다. (중략)
1번 함정이 아니라는 근거가 떠올랐다. 만약 예르닐의 발밑 버튼이 1번 함정이라면 피해를 보는 것은 예르닐 하나뿐이다. 고로 이기적인 모래시계가 작동할 리 없다.
"내가 밟자"
그럼 2번, 3번일때 터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나는 남은 행동력을 모두 소모하며 내 오른발을 예르닐 쪽으로 밀었다.
다른 소설이었다면 "너무나 많이 플레이 해 본 게임이라 1층 함정 정도는 눈 감고도 피할 수 있었다" 정도로 넘어갈만한 단순한 함정 하나. 그런데도 미궁의 법칙과 행동 수칙에 따라 하나씩 설명하며 오답을 제거하고 머리를 써서 최적의 선택을 하는 과정은 그야말로 흥미진진하다.
아직 초반부라서 어찌 될지 모르겠지만 소설 전체의 흐름이 잘 이어지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턴제 기반의 RPG 느낌을 제대로 살릴 수 있는 시나리오만 계속 나와준다면 엄청나게 재미있게 볼 수 있을 듯.
총평: ★★★★☆ 머리 제대로 쓰는 주인공의 활약이 기대되는 소설.
2024년 11월 완결.
처음 컨셉을 끝까지 제대로 유지한, 재미있는 소설.
대다수의 먼치킨 소설들이 핵을 써서 초반부터 말도 안되는 능력을 보여주는 느낌이라면 이 소설은 RPG게임 하듯 차근차근 레벨 올려가며 스킬을 키우고 전투 스케일이 커지는 형식이다.
요즘에는 사기 스테이터스로 찍어누르는 주인공 갑질하는 맛에 소설 보는 사람들이 많은지라 이런 정석적인 전개는 오히려 고구마 느낌이라고 인기 없는 경우가 많다던데
이 소설은 그 대신 주인공이 머리 써가며 영리하게 문제를 풀어나가는 재미를 보여준다.
억지로 질질 끌어서 분량 늘리는 것 없이 깔끔한 전개에 깔끔한 결말로 전체적인 완성도도 높은 소설.
총평: ★★★★☆ 게임 룰 무시하는 먼치킨 난무하는 게임(이계)진입물이 넘쳐나는 와중에 몇 안되는 게임 룰에 충실한 판타지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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