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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Nonfiction_비소설

할머니의 팡도르

by nitro 2024. 1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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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팡도르 / 안나마리아 고치 지음, 비올레타 로피스 그림, 정원정 옮김. 오후의 소묘 (2019)

삶의 막바지에 접어든 할머니. 그리고 그녀를 찾아온 사신.

할머니는 사신에게 케이크 속에 들어갈 달콤한 반죽을 먹여주며 말한다.

"맛이 어때요? 사실 이 소는 말이에요, 비스코티 사이에 발라서 설탕 가루를 뿌려 먹으면 정말 맛있지요. 지금과는 비교도 안 돼요. 아, 그 맛을 보면 참 좋을텐데. 아쉬워서 어쩌나 ⋯. 어디 보자, 음. 그래요. 적어도 일주일은 있어야지. 일주일 뒤에 내가 맛을 보여 주리다."

왠지 팥죽 할멈과 호랑이가 떠오르기도 하고, 저승차사에게 뇌물삼아 한 상 잘 차려먹이고 삼천년을 살았던 사만이 설화가 생각나기도 하는 전개다.

하지만 그 결말은 호랑이에게 죽음의 연쇄 콤보를 넣었던 팥죽 할멈이나, 저승차사를 피해가며 꾸역꾸역 죽음을 회피했던 사만이와는 전혀 다르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끝나감을 알고 이에 순응하기에 더 아름답고 따뜻한 결말.

그리고 그보다 더욱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중간중간 이어지는 황홀하리만치 아름다운 음식 이야기.

외딴집에도 설탕과 향신료에 졸인 귤 향기가 가득했습니다. 부엌에는 커다란 솥이 걸렸지요. 특별한 크리스마스 빵이 만들어지고 있었거든요. 이제껏 누구에게도 알려진 적 없고 어디에도 기록된 적 없는 오직 할머니만의 비법이었어요. 과일과 계피가 든 솥으로 황금빛 꿀이 폭포수처럼 쏟아졌고, 할머니가 주걱을 저을 때마다 반죽에는 점점 더 윤기가 돌았답니다.- p.3
사신의 이 사이에서 달콤한 것이 빠져나왔습니다. 바로 건포도 조각이었어요. 사신은 또다시 정신이 아득해지고 말았지요. 건포도 조각 속에는 가을날 포도밭의 정취가 가득했어요. 쏟아지는 햇볕과 부드러운 바람, 달콤하게 익어 가는 포도 향기에 사신은 현기증을 느꼈습니다. -p.7
"하룻밤 숙성시킨 반죽 위에 버터를 바르면 부드러운 풍미가 살아나요. 그런 다음 빵틀에 넣으면 별 모양으로 부풀죠. 마지막으로 화덕에 구우면 금빛으로 빛나는 팡도르가 완성되는 거예요. 그날이 바로 크리스마스고요." (중략) 하얀 천이 깔린 식탁 위에는 반짝이는 것들이 가득했어요. 작은 촛불과 눈처럼 흩뿌려진 아이싱 쿠키, 바삭하게 구운 찰다가 놓여 있었지요. 그 사이에 할머니의 금빛 팡도르가 별처럼 가득 빛나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함께 할머니의 빵과 과자를 맛보았어요. 금빛 팡도르가 불가의 온기보다도 더 따뜻하게 사신의 마음을 녹여 주었습니다. 사신은 두 눈을 감은 채 달콤한 맛 속으로 빠져들었어요. -p.18

딱 한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그림. 따뜻한 분위기의 그림체가 나쁘다는 건 아닌데, 이 수많은 맛있는 달다구리들의 그림이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는 건 아무리 봐도 안타깝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빨간색 동글동글한 모양이 팡도르의 생김새라고 오해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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