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 개의 파랑 / 천선란 지음. 허블 (2020)
사람보다 가볍고 오직 말을 타기 위해 만들어진, 그러나 공장에서의 실수로 학습이 가능해진 기수(騎手) 로봇.
한 때는 우승을 쓸어담던, 달리는 것을 좋아하지만 이제는 다리 부상으로 인해 죽을 날만 기다리는 경주마.
그리고 이들과 만나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
인간의 눈이란 같은 것을 바라보고 있어도 각자가 다른 것을 볼 수 있었다. 콜리는 인간의 구조가 참으로 희한하다고 생각했다. 함께 있지만 시간이 같이 흐르지 않으며 같은 곳을 보지만 서로 다른 것을 기억하고, 말하지 않으면 속마음을 알 수 없다. 때때로 생각과 말을 다르게 할 수도 있었다. 끊임없이 자신을 숨기다가 모든 연료를 다 소진할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따금씩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알아차렸고, 다른 것을 보고 있어도 같은 방향을 향해 있었으며 떨어져 있어도 함께 있는 것처럼 시간이 맞았다. 어렵고 복잡했다. 하지만 즐거울 것 같기도 했다. 콜리가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면 모든 상황이 즐거웠으리라. 삶 자체가 연속되는 퀴즈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살아 있다고 느끼는 순간이 행복한 순간이에요. 살아 있다는건 호흡을 한다는 건데, 호흡은 진동으로 느낄 수 있어요. 그 진동이 큰 순간이 행복한 순간이에요. 저는 호흡을 못 하지만 간접적으로 느껴요. 옆에 있는 당신이행복하면 저도 행복해져요. 저를 행복하게 하고 싶으시다면 당신이 행복해지면 돼요. 괜찮지않나요?˝
자아를 가진 로봇은 대부분 빨간 눈의 조명을 밝히고 인간 타도를 외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소설에서의 로봇은 세상을 배워나가며 자신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다른 사람 (혹은 말)과의 교감을 통해 간접적으로 느끼며 성장해간다.
인간과 로봇, 동물의 끊임없는 교감과 이해가 소설을 관통하는 핵심 내용 중 하나이다보니 동물권을 사정없이 침해하는 현 세태에 대한 쓴소리도 이어진다.
이미 이 행성은 인간 중심의 행성이 됐잖아요.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세상 밖으로 나가면 어느 동물도 살아남지 못해요. 동물들이 살 수 있는 네트워크가 아예 존재하지 않아요.
한 해 1만여 마리 정도의 동물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눈을 감았다. 인간도 살기 비좁은 땅이라는 이유로 동물들이 사라져야 했다. 이런 비정상적인 생태계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인간은 없다. 모두가 입을 모아 동물의 생존권을 지켜야 한다고말한다. 하지만 그중 대부분의 인간들이 여전히 개 공장에서 태어나 펫숍으로 팔려 온 강아지를 구매했고 쓰레기통을 뒤지는고양이를 발로 찼다. 털이 뭉친 노견은 너무 못생겼다 느꼈으며 갓 태어나 젖도 떼지 못한 개만이 가족이 될 수 있는 조건을 갖췄다고 생각했다. 고양이에 대한 최소한의 상식 없이 집에 들였다가 털이 너무 많이 빠지거나 아이가 생겼다는 이유로 유기했고 같은 케이지 안에 넣어 서로 죽이는 핸스터를 징그럽다는 눈으로 바라보았으며 수온과 염분을 맞추지 못해 떼죽음당한 열대어를 변기통에 흘려보냈다. 새를 위해 새장을 하늘이 보이는 베란다에 놓았고 그해에 유행했던 동물들은 반짝 개체수를 늘렸다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가축이 된 짐승과 인간과 친한 몇몇의 동물들 빼고 모든 동물들은 몇 세기 안에 사라질 것이다.
다만 이런 접근에는 가슴이 몰랑몰랑해지며 반성하기보다는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 아닌가' 싶기도 한게, 전쟁이 끝나려면 양쪽이 모두 총을 내려놔야 하기 때문. 인간이 동물들에게 함께 살아갈 권리가 있다고 인정하고 생활 영역을 양보하여 "자연스러운" 생태계를 회복시키면, 동물들이 인간을 식사 메뉴의 옵션으로 여기던 과거가 돌아오지 않을거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동물들의 자연사는 대부분 다른 동물에게 (상당히 끔찍하게) 잡아먹히는 것으로 끝난다. 이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간은 그야말로 인류 역사의 대부분을 자연과 투쟁하는 데 보냈고, 동물권 보장의 이야기가 나온 것은 그야말로 승자의 여유를 부리며 '호랑이나 사자도 더 이상 우리에게 위협은 아니다'라는 확신이 생겼기 때문.
하지만 호랑이와 사자를 우리의 삶 속에 동료로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들 역시 인간과 자연스럽게 공존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점을 망각하면 가축과 벌통을 작살내며 사람 습격의 위험성이 점점 높아지는 지리산 반달곰 꼴이 날 수밖에.
이러한 관점 차이를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재미있게 읽은 SF소설. 인간과 동물이라는 고전적인 구도에 로봇이라는 또 다른 주연을 추가함으로써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세상을 보는 시야를 제쳐두고 이야기 자체만 봐도 꽤나 재미있게 이어지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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