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Read/무협&판타지

판타지소설 리뷰: 알브레히트 연대기

by nitro 2020. 4. 4.
728x90

판타지 소설이라고 하면 또 그 안에도 여러 장르로 나뉘게 되지만, 그 중에서 쓰기 가장 어려운 장르라면 서사시적인 중세 판타지 아닌가 싶다. 

틀에 박힌 세계관을 포기한다는 건 수많은 유용한 소재들을 포기한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엘프나 드워프 등의 이종족, 고블린과 오크에서 시작해서 리치나 발록에 이르는 몬스터들, 알기 쉽게 분류 해 놓은 원소계열 마법 등.

굉장히 쉽게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는 요소들이 사라지면서 독자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세계관을 새로 소개해야 하니 작가의 할 일이 늘어나기 마련.

게다가 신화적인 요소들을 배제하다 보면 아무래도 이야기가 현실성있게 흘러야 하고, 현실성있게 흐르다 보면 또 실제 역사와 비교하며 현실 고증에 대한 요구치까지 높아지기가 십상이다.

이런저런 장애물들을 넘으려면 작가의 필력이 최소한 어느 정도는 뒷받침 되어야 하는 건 기본.

그래서 이 소설도 처음에는 현대 사회를 살던 서른 살짜리 아저씨가 이세계의 열 다섯 먹은 영주 아들로 빙의한다.

아무래도 현대인의 기억이나 감정이라는 요소가 독자의 흥미와 공감을 유발하는 동시에 판타지 세계에서 이야기를 풀어내다가 막힐 때면 언제라도 끄집어낼 수 있는 슈팅게임 폭탄과도 같은 무기가 되어주기 때문.

그런데 작가가 원래 계획은 완전 정통 중세 판타지를 쓸 계획이었는지 이런 요소는 도입부에만 잠깐 등장하며 주인공의 혼란스러운 심정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고, 그 이후로는 그냥 네이티브 중세인이라는 게 함정.

대략적인 줄거리라면 주인공이 어리숙하고 성질 더러운 영주 아들에게 빙의되었는데, 영지민을 죽이는 바람에 아버지가 영지에서 쫓아내고, (한 단락 끊고) 길거리를 떠도는 방랑 기사에서 막강한 무력을 자랑하며 영주가 되고 황제가 되는 그런 이야기.

굳이 중간에 한 단락 끊은 이유는 극 초반부가 상당히 혼란의 도가니이기 때문. 호불호가 꽤 갈리는 이유도 바로 이 초반에 주인공 삽질하며 고구마 꾸역꾸역 먹이는 걸 못 참는 독자가 많기 때문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렇다고 그 뒤부터 갑자기 글이 미친듯이 재밌어지며 눈물 흘리게 만드는 명작인가 하면 또 그런 것도 아니다. 

이건 작가의 능력 부족이라기보다는 정통 판타지 서사시의 약점이기도 한데, 독자를 금방금방 몰입하게 만드는 MSG를 칠만한 부분이 별로 없다보니 읽는 사람이 '재밌다'라고 느끼기 위해서는 읽어야 하는 글의 덩어리가 크기 때문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는 최소한 평작 정도는 된다고 생각하는데, 일단 필력이 나쁘지 않다. 사람 홀리는 글재주라는 건 아닌데, 읽다보면 왠지 '아, 작가가 책 좀 읽은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기본이 탄탄하다.

웹소설 플랫폼이 대세가 된 이후로는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를 떠나서 글의 전개 자체가 너무 가벼워진 분위기라 이렇게 글을 좀 진중하게 써 나가는 소설을 보면 왠지 취향 맞는 옛 친구를 만나는 느낌이라 아무래도 좀 후한 평가를 주게 된다.

상대적으로 차분하면서 서사시적으로 글을 전개하다보니 모든 사건의 귀결이 "위대한 알브레히트 황제께서 빛나는 황금갑옷을 입고 후광을 비추며 번개치는 도끼로 적들을 참살하시니 그 앞을 가로막는자 다들 흩어지더라"는 식으로 정리되더라도 황당하기보다는 차라리 먼치킨 특유의 시원한 느낌이 들 정도.    

비슷한 전개가 반복되거나, 실제 역사적 사건을 거의 그대로 가져다 쓴다거나 하는 점은 단점이지만

기본기는 갖춘 필력, 나름 탄탄한 세계관 묘사, 속 시원한 주인공 난동 등이 이를 덮으며 그럭저럭 볼만한 소설로 만드는 듯.

하지만 '재미'가 최고의 가치로 꼽히는 장르 소설판에서 문학적 완성도가 조금 더 높다는 게 성공적인 작품의 척도는 아니기에 평작 수준이 한계.

총평: ★★★☆☆ 글 자체는 차분하게 잘 썼는데 미친듯한 몰입감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틀에박힌 마법이나 몬스터가 안 나오면서 주인공이 무쌍찍는 중세 판타지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 읽어볼만 할 듯.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