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사이트를 운영하면서 보람을 느끼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하나는 내 추천글 덕에 재미있는 소설을 읽을 수 있었다는 감상이 올라올 때.
그리고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들이 댓글로 추천한 소설을 읽었는데 완전 취향에 맞는 숨은 명작이었을 때.
변방의 외노자 역시 제목만 보고 걸렀다가 추천 댓글이 여러번 올라와서 보기 시작했는데
"이걸 못봤으면 인생 손해볼 뻔 했어!"를 외치며 읽었다.
엘프와 오크, 드래곤이 나오지만 외계인과 우주선도 등장하고, 그렇다고 퓨전 판타지라고 하기엔 그 둘의 특징적 요소는 별로 없고 자기 이야기 풀어나가며 판타지와 SF의 소재를 약간 가져온 수준인지라 구분이 살짝 애매하다.
UN이 결성되자 '드디어 행성을 대표하는 국제기구가 생겼다'며 접촉해온 '범차원 지성체 재배치 위원회'.
우주 곳곳의 여러 외계인들이 지구로 이민오는 것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여러가지 물질적, 기술적 혜택을 약속한다.
그 결과 엘프와 오크를 시작으로 수차례에 걸쳐 대규모 이민 + 소규모 이민 + 불법 이민이 성행하며 이를 관리하는 이민국도 출범하는데,
이러한 이민국 요원으로 근무중인 주인공 예민준.
겉보기엔 지구인이지만 실제로는 과거에 저지른 범죄로 인해 기억소거 + 육체교환을 받고 강제노역중이다.
여러 행성을 거치며 무려 800년 동안이나.
재벌 총수 드래곤, 엘프 비서, 고블린 세입자, 오크 형사와 함께 한 손에는 인공지능 후라이팬, 다른 한 손에는 이혼한 촉수괴물 아내가 만들어준 오리하르콘 후라이팬을 들고 지구와 우주를 누비며 잃어버린 과거와 숨겨진 진실을 파헤치는 내용.
이렇게 요약해놓으니 무슨 유쾌발랄한 명랑소설 분위기인데, 실제로는 꽤나 진지하면서 미친듯한 몰입도를 보여주는 판타지 소설이다.
시작은 소소한 사건들이 이어지며 옵니버스식으로 이야기들이 이어지나 싶더니 정신 차려보면 어느 새 거대한 사건의 소용돌이에 휘말려있다. 게다가 중간중간 던지는 철학적 사고 역시 취향에 딱 맞는 듯.
"한 종족을 먹지 말아야 할 존재로 인정하는 근거, 상대에게 존엄성을 부여하는 기준을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지 현대 우리 사회에서는 어느 정도 합의가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들이 그것에 합의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우리는 생각합니다. 자유롭게 사고하고 스스로 선택할 의지를 지닙니다. 우리는 존재 자체로 존중받아야 합니다. 당신들은 우리를 먹어서는 안됩니다."
이 문장만 놓고 보면 별 재미가 없다. 하지만 드래곤 로드가 용혈을 연구하다 자신들의 피에 남겨진 축산물 이력 시스템의 코드를 발견하고, 미지의 상대에게 유언장 삼아 남긴 편지라면? 드래곤은 먹어도 되는가, 먹어서는 안되는가? 이는 단순히 소설 속의 이야기일 뿐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며 느끼고 생각해볼만한 화두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내가 좋아하는 '생각거리를 재미있는 내용으로 포장해서 던져주는' 장면이 곳곳에 등장하기 때문에 그야말로 취향저격.
사고실험과 언어유희가 뒤섞여있으면서도 내용이 너무나 재미있어서 도무지 빠져나올 수가 없다는 점에서는 왠지 이영도가 떠오르는 스타일이기도 하다.
총평: ★★★★★ 오래간만의 별 다섯개짜리 소설. 가볍게 읽기엔 호흡이 길다. 하지만 책 읽듯 자리잡고 읽는다면 단번에 다 읽을만큼 흡입력 강한 소설.
2021년 9월 완결.
오래간만에 1세대 판타지 느낌이 나는, 그러니까 다시 말해 단행본 호흡으로 읽을 법한 재미있는 소설을 읽은 느낌.
요즘 웹소설은 워낙 빠르게 전개되다보니 좀 관념적인 내용이 끼어들고 글의 호흡이 긴 소설은 호불호가 많이 갈린다.
그래도 여러 사건들이 연속으로 이어지며 터져주는게 몰입도를 끝까지 유지하게 만든다.
다만 클라이막스 부분에서 드래곤이건 마왕이건 뭐든지 최종보스라고 할만한 게 나와서 최종 난관을 물리치고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줘야 할텐데, 이번 작은 그런 면에서는 확실히 약한 면모를 보인다.
총평: ★★★★☆ 주인공이 킹왕짱 강해지는 부분은 거부감이 없는데, 그렇게 신적인 존재가 되고 나니 대적할 수 있는 상대가 없어서 결말이 좀 흐지부지 된 듯한 느낌이 드는 게 개인적인 불만. 하지만 전체적으로 놓고 봤을 때 굉장히 재미있고, 깊이도 있고, 필력도 괜찮은 소설임을 부정할 수는 없을 듯. 다만 대여점 시절 소설처럼 긴 호흡의 글을 싫어하는 사람은 금방 지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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