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각과 환상 / 한태희 지음. 중앙books (2021)
“나귀가 지나가는 좁은 골목을 따라간다. 구시가지의 어느 허름한 건물 입구, 안내인이 이름 모를 풀 한 움큼을 건넨다. 그의 손짓에 따라 풀을 코에 갖다대자 달콤하고 상쾌한 민트향이 스며든다. 계단을 오르자 곧 깨닫는다. 이 향기로운 환대의 이유가 실은 어마어마한 악취 때문이라는 것을. 3층 발코니 아래를 내려다보니 거대한 벌집을 닮은 가죽 염색 작업장이 펼쳐진다. (중략) 본격적인 염색 처리 전 가죽을 소의 오줌과 비둘기 똥이 들어간 용액에 이틀 정도 담가 두면 가죽이 부드러워지고 염료가 잘 스며드는 상태가 된다고 한다. 민트 송이를 파고드는 강렬한 냄새의 정체는 그야말로 맨살과 똥오줌이 섞인 생명체의 노골적 모습이다.”
“대성당을 마주한 광장 카페에서 와인 잔을 든 사람들이 유쾌하게 이야기를 나눈다. 리오하 와인 고유의 온화한 풍미가 공기에 흩어지는 듯 하다. 나는 커피와 함께 오렌지 커스터드 케이크를 맛보며 입안 가득 상큼한 향을 음미했다. 오렌지를 비롯한 감귤류는 본래 중국이 원산지인데, 10세기경 아랍 상인들이 지중해 지방에 전파한 후로 남부 유럽에서 널리 재배되어 왔다. 스페인 남부를 여행하다보면 거리에도 오렌지 나무들이 많이 심어져 향기를 풍긴다.”
의과대학 교수가 세계를 여행하며 보이는 풍경을, 후각에 중점을 두어가며 묘사한 여행기.
상당수의 여행기가 그렇듯, 그 지역의 풍경이나 건축물 및 생활상 등을 우선 보이는대로 묘사하고, 여기에 덧붙여 역사적 배경이나 흥미로운 사실을 덧붙이고, 저자 개인의 감상과 느낀점으로 마무리한다.
하지만 여기에 아름다운 사진과, 후각에서 느껴지는 자극에 비중을 두어 글을 쓴 덕에 훨씬 더 현실감이 느껴지는 것이 특색이다.
후각에 비중을 두다보니 당연하게도 먹는 이야기도 많이 나오는 것 역시 마음에 든다.
여러 가지 자극과 이야기가 세계 방방곡곡을 누비며 엮이다보니 일견 정신없게 보일 수도 있는데, 오히려 그렇기에 향로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 속 환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카이로의 오래된 향수 가게, 인도 갠지스강 하류 거대한 늪지대의 진흙 냄새, 모로코 가죽 작업장의 악취, 세비야 궁전의 오렌지 꽃향기, 더블린 도서관의 양피지 냄새, 지중해 작은 어시장의 생선 비린내. 세상의 냄새를 좇는 일은 그 자체로 하나의 새로운 여행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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