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까지 가자 / 장류진 지음. 창비 (2021)
각 등급의 알파벳은 이런 뜻이었다.
Outstanding(특출함), Incredible(뛰어남), Meet requirement(요구 충족), Below requirement(요구 이하), Need supplement(보충 필요).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바꿔 불렀다. 아무래도 이쪽이 훨씬 직관적이었다.
O: 오짐, I: 인정, M:무난, B:별로, N:나가.
“언니, 그래서 결론이 뭐야? 지금 우리한테 비트코인을 하자는 거야?”
“다해야.”
언니가 자세를 낮춰 테이블 건너 앉은 내 쪽으로 몸을 슬쩍 기울이더니, 이렇게 말했다.
“넌 내가 그렇게 뻔한 소리를 할 것 같니?”
언니는 이더리움을 하자고 했다.
처음 먹어본 유기농 목장의 우유는 맛도 물론 좋았지만, 그걸 고르는 나 자신이 비로소 건전한 시민이 되었다는 충만한 기분을 느끼게 해줬다.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세련된 로고가 그려진 유기농 우유를 유유히 집어 장바구니에 넣는 동안, 내 머릿속에서 악덕 기업의 사장은 경영악화의 책임을 지고 권좌에서 내려와 어쩐지 수갑을 찬 채 촘촘한 창살 안에 들어가 있었고, 그 위로는 우리에 갇혀 있지 않고 너른 풀밭에서 자유롭게 뛰노는 젖소들과 밀짚모자를 쓴 선한 농부의 땀과 미소가 오버랩되었다. 그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만족스러운 소비 경험이었다.
사회초년생이라기엔 이제 슬슬 세상의 쓴맛을 알아가는 5년차 회사원 다해가 비슷한 처지의 회사 동료 은상, 지송과 함께 가상화폐에 손을 대고 운이 좋아 돈 좀 벌고 성공적으로 빠져나온 이야기.
처음엔 보름달을 배경으로 파스텔톤의 핑크핑크한 표지 때문에 구석의 모니터에 띄워진 코인 차트를 미처 못 보고 지나쳤다. 그러다가 도서관에서 불티나게 대출 횟수가 올라가는 걸 보고 뭔가 싶어서 읽어봤는데 기대 이상이었던 소설.
사실 여기서 비트코인은 하나의 소품에 불과하고, 그보다 중요한건 팍팍한 회사원의 삶을 현실적으로 묘사하면서 여기에 돈이 요즘 사람들에게 얼마나 가뭄의 단비같은 존재로 여겨지는지 부각시킨다는 점인듯 하다.
비트코인으로 하루아침에 부자가 되어 플렉스하는 웹소설을 많이 봤지만 이렇게 소소하게 현실적(?)으로 사이다를 먹여주는 소설도 괜찮은 맛이다.
다만 결말이 해피엔딩이라는 점에서 ‘어른들을 위한 동화’의 범주를 벗어나지는 못할 듯. 현실적이라는 단어 뒤에 물음표를 붙인 이유이기도 하다. 대다수의 사람이라면 3억쯤 벌었을때 절대 도망칠 수 없으니까. ‘3억으로 뭘 할 수 있겠어? 조금만 더 벌면 서울에 내집 마련이… 조그만 건물이… 이자만으로도 놀고 먹는 인생이…’ 이러다가 통장 잔고 마이너스 삼천만원의 가혹한 현실에 맞딱뜨리게 되는게 진짜 현실이다.
하지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소시민이 조금이나마 웃음을 짓고 행복한 상상에 빠질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점에서 동화로서의 가치는 충분히 해내고도 남는 소설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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