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굴레에서 (전2권) / 서머싯 몸 지음, 송무 옮김. 민음사 (1998)
내가 이 책을 언제 처음 읽었나 기록을 살펴보니 2008년도에 구입했다.
아마 도서관에서 먼저 읽고는 ‘세상에 이렇게 사람 열받게 만드는 책은 처음이야. 꼭 소장해야 해’라면서 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렇게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 요즘 웹소설식 표현으로 치면 - 고구마를 꾸역꾸역 먹이다못해 암 유발하는 소설이 또 있을까.
“해리와 점심을 먹고 왔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랬어?”
“토요일에 가는 여행 말예요. 아직 같이 가고 싶은 마음이 변하지 않았으면 같이 갈게요.”
순간 짜릿한 승리의 쾌감이 가슴을 스쳤다. 하지만 그것도 한순간. 곧 의심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돈 때문인가?” 그가 물었다.
“얼마간은요.” 그녀는 간단히 대답했다. (중략)
“난 당신을 슬프게 만들고 싶지 않아. 싫으면 나랑 가지 않아도 돼. 그래도 돈은 주겠어. 그 친구를 사랑해서 병이 났는데 같이 가서 뭐가 좋겠어?”
그 순간 퍼뜩 필립에게 야릇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것을 더 생각해 보지도 않고 그는 그냥 떠오르는 대로 말하고 말았다.
“왜 그 친구랑 같이 가지 그래.”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우리에게 돈이 없다는 건 알잖아요.”
“돈은 내가 주지”
“당신이요?”
그녀는 일어나 앉아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이 반짝이기 시작하고 양볼에 화색이 돌았다.
사랑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를 좋아한다는데, 자신과 함께 여행을 가는 대신 그 남자와 가라고 돈까지 주는 상황이다. NTR(네토라레: 좋아하는 사람을 빼앗김으로 해서 성적 흥분 및 만족감을 얻는 성향)이나 폴리아모리(연인을 독점하지 않는 다자연애)도 아니고, 주인공 필립의 심정 묘사를 보면 이건 그냥 희대의 어장관리 달인 밀드레드를 만나 이리 뜯기고 저리 뜯기며 정신승리를 연발하는 찐따가 따로 없다. 좋은 여자는 놓치고, 주식 투자로 대차게 말아먹는 와중에 작가는 마지막에 가서야 “햇빛이 빛나고 있었다”며 필립이 아픔을 통해 성장했다고 하는데… 읽는 입장에서는 그 전에 몇 번은 죽었겠다 싶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다. 교양 소설과 대중 소설을 알차게 섞어서 몸에 좋은 불량식품 만들어 놓은 느낌이다.
끝없는 고난과 제약 속에서 꾸물꾸물 몸부림치며 조금씩 나아가는 필립의 모습이 작가의 모습을 투영한 동시에 우리들의 삶에 공통적으로 비치는 뭔가를 담고 있기 때문일 듯 하다. 요즘으로 치면 웹툰 “찌질의 역사”를 보며 느끼는 감정과 비슷하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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