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최악의 역삼 게이트를 클리어하기 위해 투입된 힐러, 권윤기.
"나는 그 비장미 넘치는 파티에 막차로 합류한 불운아였다. 정부에서는 B급 힐러였던 나를 여명파티에 넣기 위해 속성으로 승급시켰다. 치유능력만 보면 A급이 낭낭하다는 것이 승급의 명분이었다.
아마 위험한 작전에 B급을 투입했다는 지적을 피하고 싶었던 거겠지.
씨발년들. 소고기 등급도 그딴 식으로 책정하지는 않을 텐데."
죽을 고생을 하며 단 두명의 생존자만을 남긴 채 클리어한 역삼 게이트.
그런데 3개월에 걸친 토벌 끝에 사회로 복귀해보니 바깥 세상은 벌써 10년이 지난 상황.
'저 어린 것을 혼자 두고 죽을 수는 없다'며 주인공이 이 악물고 게이트를 깨도록 만들었던 여동생은 어느 새 S급 헌터가 되어 헌터협회 회장직을 차지하고 돈을 쓸어 모으는 중.
하지만 현실은 겉보기만큼 만만치 않다.
여동생은 적폐퀸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벌어들이는 돈만큼이나 범국민적으로 욕을 얻어먹고,
역삼 게이트 희생자 가족들은 또 하나의 권력집단이 되어 헌터협회를 갖고 노는 중이다.
원래부터 정치에 관심이 많아 아르바이트도 국회에서 했을 정도였던 정치 덕후 주인공이 이를 두고 볼리가 없다.
게이트에서 개고생하며 끌어올린 능력치와 원탑 헌터 여동생이라는 배경, 그리고 특유의 정치력을 바탕으로 장애물을 밀어내며 정계에 입성하는 이야기.
"업계를 장악하기 위해 굳이 모든 길드, 모든 헌터와 일일히 상대해서 힘을 과시할 필요는 없었다.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길드는 힘으로 제압하고 나머지는 방치하거나 오히려 포용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갈라치기는 좀 오래된 방법이긴 하지만 언제나 유효했다. (중략)
"저, 백제 길드 대표가 권윤기 부회장에게 면담 요청했다가 까였답니다."
"뭐?"
"그, 비서가 그러는데 둘이면 충분하다고 했다던데요."
둘이면 충분하다니. 설마 항복을 선착순으로 받았다고? 잠시 고민하던 지석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오늘 권윤기와 나눈 훈훈한 대화가 실은 조련의 과정이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좀 심하게 말하면 코뚜레를 꿰였다고 봐도 무방했다.
'허, 이런 젠장.'
그러나 당했다는 생각까지는 들지 않았다. 그 조련조차 받지 못한 백제와 금성 길드가 앞으로 어떤 일을 당할지 대충 예상이 갔으니까."
헌터로서의 능력이나 돈으로 무작정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정치권에서 하는 일이라는 게 늘 그렇듯 상대의 약점을 틀어쥐고 당근을 살살 흔들어가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훌륭하다. 그렇다고 상대를 무조건 바보로 만드는 것도 아니라서, 읽고 있으면 '꽤 그럴듯하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장점.
제대로 된 평가는 중반부 넘어가야 할 수 있겠지만, 일단 지금까지는 예전에 연중됐던 모 헌터정치물이 떠오를만큼 괜찮은 소설.
2022년 9월 완결.
요즘 현대판타지 (특히 정치외교물)에서 툭하면 악의 축 내지는 끝판 대마왕으로 나오는 중국이 "중국"하려던 것을 주인공이 막아내고, 중국을 너무 좋아하는 사람답게 여러개로 분열시키며 대미를 장식한다.
워낙 스케일이 커진 마당인지라 자신이 미는 후보를 대통령 만드는 킹메이커 겸 국무총리가 되는 것은 오히려 소소한 에필로그.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분위기, 무너지지 않는 전개가 마음에 든다.
꼼꼼히 따지고 들자면 몬스터가 튀어나오는 세상의 국제 정세가 이렇게 소설처럼 쉽게쉽게 풀릴 리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면에서는 임기 첫날 국회의원이 되며 쌩고생을 하는 누군가가 좀 더 현실성이 있긴 하다), 재미라는 측면에서 보면 또 이렇게 팍팍 치고 나가며 남들 무릎 꿇리는 맛도 괜찮지 싶다.
총평: ★★★☆☆ 게이트와 정치물을 잘 버무린 현대판타지. 정치헌터가 등장하는 소설이 취향이라면 별 하나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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