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평화롭게 살아가는 일상은, 실제로는 언제 끝장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이미 공룡을 멸종시킨 전적이 있는 운석 충돌에서부터, 레이더가 잘못된 신호를 포착하는 바람에 터질 뻔 했던 핵전쟁의 위협, 흑사병과 스페인 독감을 잇는 코로나가 보여주는 치명적인 전염병 확산에 이르기까지.
여기에 정체불명의 좀비 바이러스가 퍼진다거나, 게이트가 열려 몬스터가 떨어진다거나 하는 약간의 허구적 장치만 더하면 마치 도미노 무너트리는 것 마냥 연쇄반응이 일어나며 지구는 난장판이 되고 만다.
그래서 미국에는 이런 포스트 아포칼립스 시대를 진지하게 대비하는 '생존주의자'들 역시 꽤나 많다. 핵폭발을 견뎌내고 방사성 낙진이 줄어들 때까지 버티는 것을 목표로 하는 방공호에서부터 장기적인 생존을 위한 농산물 재배와 약탈자를 퇴치하기 위한 무기까기 갖춘 본격적인 요새도 드물지 않다.
그리고 이 소설의 주인공, 박규 역시 이러한 생존주의자 중의 한 명이다.
'문명이 망하지 않으면 내가 망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온갖 대출을 끌어모아서 만든 벙커.
다른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들이 여러 사람과 함께 복작거리며 살아가는 반면, 박규는 혼자서 살아남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방공호 한가운데 덩그러니 설치된 변기는 - 환기와 배수시설 때문이라는 설명이 붙어있지만 - 앞으로도 이 공간은 주인공 혼자만의 장소가 될 확률이 높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렇다고 인간관계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멜론 형님이 쏘아올린 스타링크 인터넷 덕에 '비바! 아포칼립스'라는 커뮤니티가 활발히 돌아가고 있으니까. 방공호 공사를 해줬던 인부들이 약탈자가 되어 쳐들어 오거나, 문명 붕괴 이후 가장 무시무시한 악몽 중의 하나인 치통이 찾아오는 등 여러가지 소소한 일과를 겪으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주인공의 삶이 무미건조하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Keystone: (비보) 옆동네 천막 친 개새끼들 현황 - 아직도 안 나감
익명118: 서버 응답 속도 전보다 느려진 것 같지 않냐?
iamjesus: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unicorn18: 내 꼬물이 딱딱해져써...
익명552: 현재 서울 상황.jpg
Kyle_Dos: 윗 글 낚시임
SKELTON: 오늘 점심밥으로 뭐가 낳을까요?
...
언제나 평온한 내 마음의 고향.
자칫했으면 야생동물과 싸우며 생존경쟁 벌이는 무인도 서바이벌과도 크게 다를 바 없어지는 포스트 아포칼립스물이 넷 커뮤질이라는 소소한 활동이 더해지며 더할나위 없는 재미를 선사한다. 인터넷이라는 공간에는 별별 인간들이 다 있고, 그 다양한 인생들은 언제나 상상을 초월하는 사건사고를 일으키니까.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며 목숨걸고 오프 한 번 해보려는 인간, 당근마켓마냥 물물교환하려는 인간, 그 와중에 사기치려는 인간, 어그로 끄는 인간 등 주인공은 그 다양한 인간군상과 얽히며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곳곳에 남아있는 현대 사회의 불합리성은 그야말로 한 편의 블랙코미디를 보여준다.
지하철 안에서 나는 내 눈을 잠시 의심했다.
<삼전 '베스트루이스 빌헤링턴' 입주민 구역>
<라벨 '치프 헤드스폰' 입주민 구역>
<브란디아 '프라우드 노블 힐' 입주민 구역>
<로투 '루페르트 라이히펠리스' 입주민 구역>
...
...
지하철 방공호 곳곳이 아파트 단지별로 구획화되어 있었다.
완장을 차진 않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완장을 찬 장년 사내와 여성들이 신경질적으로 오가며 자신의 구획을 철저히 마크하고 있었다.
60줄은 넘어 보이는, 빨간 베레모를 쓴 사내가 내 앞에 대뜸 나타나 퉁명스럽게 물었다.
"아저씨, 어디 사람이에요? 이 동네 사람이야?"
"반말은 자제해주시죠. 댁이 제 상전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 동네 사람이세요?"
"아니오."
"비입주민은 저쪽으로 가세요."
비입주민 구역은 지하철 역사 안에서도 가장 구석진 곳에 있었다.
<임대 및 기타>
빛조차 제대로 닿지 않는 구역.
몇몇 사람들은 우울한 얼굴로 서성거리고 있었고 희미한 라디오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이보다 더 웃기면서도 현실적인 아포칼립스가 또 있을까.
3~4회 정도가 하나로 이어지는 짤막한 에피소드가 연속되는 형식이라 부담없이 읽을 수 있고,
소소한 사건이라도 빠져들듯 읽게 만드는 몰입력이 있는데다가, 곳곳에 녹아있는 유머 센스와 사회 비평은 깊이감마저 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공감대를 형성하며 현실감을 느끼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 역시 이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각종 인간(진상 고객이나 막장 상사)들과 부대끼며 월급날만 기다리며 스마트폰에서 관종짓하는 키보드 워리어가 되는 현대인의 삶이랄까.
"집 밖은 위험해"를 입에 달고 살면서 생존에 꼭 필요한 일 아니면 집안에 틀어박혀 소소한 취미 - 양모펠트를 만들거나 비트박스 동영상을 찍거나 커미션 그림을 그리거나-에 열중하며 그 결과물을 인터넷에 공유하는 것이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우리들의 이야기이기에 이 소설은 현실적이다. 현실적이기에 몰입이 되고, 공감이 가며, 재미를 넘어선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지금도 더할나위 없이 좋긴 하지만 단편적인 에피소드로만 천년만년 이어갈수는 없을테니 결국 커다란 줄거리 역시 서서히 전개되어야 할텐데 후반부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지며 괜찮은 결말만 보여준다면 별 다섯개짜리 아포칼립스물 탑티어 소설이 될 수도 있을 듯.
총평: ★★★★☆ 단편글이 이어지는 아포칼립스 생존물. 필력도 좋고 재미있으니 아포칼립스물 좋아하는 사람은 필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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