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먹은 아재가 되다보니 이젠 새로운 뭔가를 머리에 쑤셔넣는게 조금 지겨워진다.
선협물에 쉽게 손이 가질 않았던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묵향이라는 놈이 나타나서 절정, 화경, 현경, 생사경 등의 체계를 세울 때만 해도 그러려니 했는데
이제는 신선들이 나타나며 연기,축기,결단,원영 등의 단계를 만드는 것도 모자라서 수많은 단계들을 덕지덕지 붙여댄다.
"수도자의 경지 중에서 가장 낮은 경지를 연기기라고 부르지. 연기기는 총 14단계로 나누어진다"
"나는 단순한 축기 후기가 아닌 축기 대원만이라는 경지의 수도자이니, 그대는 결단기 직전의 수도자와 믿을 수 없는 분전을 한 것이니라"
"신선의 경지에 도달한 대경계, 신선에 근접한 중경계, 사람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는 소경계가 그것이네. 소경계의 6단계 단수, 연기, 축기, 결단, 원영, 천인의 경지. 중경계의 5단계 사축, 합체, 쇄성, 성반, 개열의 경지. 그리고 대경계는 진선의 단계라는데 나도 잘 모른다네."
각각의 단계가 다시 세분화되고,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단계는 더 거대한 체계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질리기까지 한다.
선협물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을 벌레처럼 여기며 나만 잘 살면 된다는 극단적인 이기주의가 팽배한 세상 역시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런데 회귀수선전에서는 굳이 이런 경지들을 외우지 않아도, 그냥 읽다보면 '아, 레벨업 했구나. 아, 2차 전직 했구나' 싶은 수준으로 이해가 된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존의 선협물이 1의 경지에서 100의 경지까지 올라가는 과정에서 지루해지기 쉬웠던 반면, 이 소설은 1에서 10까지 올라간 후 회귀. 2회차에서는 1에서 10까지 빠르게 올라간 후 20까지 성장한 후 회귀. 이런 식으로 회귀를 거듭하며 볼거리를 지속적으로 제공한다는 점이다.
초반부에서는 팔다리를 제물로 뜯어먹히며 겨우 살아남았던 괴물 여우가, 중반부를 거치며 그 강함의 크기를 체감하고 도망칠 수준이 되었다가, 시간이 더 지나 호각으로 맞서 싸우는 것을 넘어 드디어 두들겨 패고 영단을 빼앗아 왔을 때의 쾌감이 그런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평면적으로 무조건 강해지며 이전 회차의 복수하는 것에만 매몰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회귀를 하면서 지금껏 쌓아왔던 인간관계가 모두 무(無)로 돌아가는데 대한 허무함과 공포심이 부각된다.
"이 멍청한 제자놈!"
"서 수사"
"서 도우"
시간이 지나며 바뀐 나에 대한 호칭들.
언젠가, 청문령의 입에서 선배님이라는 말이 나오게 될까. (중략)
하지만 나는 어쩐지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생긴 것을 느꼈다.
청문령의 입에서 선배님란 말이 나온다는 것이 나는 왠지 무서웠다.
그리고 이 끝없는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한 목적의식이 주인공을 그 다음 단계로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된다.
회귀와 그 다음 회귀 사이를 잇는 내용이 마치 옵니버스 구성의 소설을 읽는 것처럼 나름대로의 재미가 있으면서도 각각의 등장인물과 세계관이 (당연하게도) 다 이어지는 것 역시 매력적이다.
다만 선협물 특유의 반복적인 레벨업이 가져오는 무미건조함을 중,후반부 들어서며 어떻게 극복할지가 관건.
총평: ★★★☆☆ 선협물이라는 장르를 기존의 무협 독자들도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잘 녹여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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