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혀 / 조경란 지음. 문학동네 (2007)
자신의 연인을 다른 여자에게 빼앗겨버린 요리사의 이야기. 그러다보니 식욕과 사랑의 유사점을 부각시키는 묘사가 책 전체에 걸쳐 등장한다. 음식이나 요리 이야기는 보통 따뜻하고 행복하고 즐거운 분위기가 많은지라 간혹 이런 책을 접하게 되면 약간 당혹스러우면서도 새로운 느낌을 즐기게 된다. 다만 저자가 너무 요리를 사랑한 나머지 음식 이야기가 다른 주제를 압도하는 경향이 약간 보인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매우 만족스럽게 읽었지만서도.
그가 집안을 돌아다니며 장난스럽게 내 이름을 부르고 또 부르는 동안 나는 터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달걀노른자 위에 에멘탈치즈 간 것과 소금, 후추를 뿌려 달걀프라이를 만들었다. 햇빛에 바싹 말린 흰 테이블보를 티테이블에 펼쳐 깔고 그 위에 방금 만든 달걀프라이와 무염버터, 블루베리잼, 그리고 오븐에 덥힌 바게트를 올려놓았다. 소박하고 따뜻하고 달콤한, 우리가 가장 좋아한 아침식사였다. 그는 여느 때처럼 버터와 잼을 두껍게 바른 빵을 커피에 푹 담갔고 나는 잼이 들러붙은 티스푼을 역시 잔 속에 담가 뜨겁고 진한 커피에 잼이 녹아 단맛이 스며들기를 기다렸다. 나는 아직도 그 커피잔 속에 맨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잼의 단맛과 입천장에 닿아 오래 남아 있던 부드럽고 촉촉한 빵가루의 촉감들을 기억한다. - 32p
삼촌이 나에게 마지막으로 주고 간 것은 남자 주먹만한 반투명 돌이다. 표면에 흐릿한 분홍색 톱니무늬가 패어 있는 홍수정처럼 생긴 그 돌을 나는 유심히 바라보았다. (중략) 삼촌은 나에게 그 돌이 바윗조각이 아니라 소금산에서 채취한 소금덩어리라고 정정해주었다. 최상급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하고 아름다운 그 커다란 덩어리가 소금이라는 게 믿기지 않아 나는 혀 끝으로 살짝 핥아보았다. 서서히 입 안 전체로 짭조름한 맛이 번지는 게 느껴졌다. 태양열로 증발시켜 어렵게 얻은 굵은 천일염 결정체 한 알을 혀 한가운데 올려놓았을 때 느꼈던, 그런 기분 좋은 짠맛이었다. (중략) 소금으로는 야채를 데칠 때 색깔을 보존할 수 있고 샐러드에 들어갈 때는 야채의 쓴맛을 없애주기도 하고 아이스크림을 얼릴 수도 있고 끓는 물을 빨리 식힐 수도, 생선과 고기를 절일 수도, 꽃꽃이를 싱싱하게 유지할 수도, 옷감의 얼룩을 없앨 수도, 목의 통증을 완화시킬 수도, 비누를 만들 수도 있지만, 그중 소금의 가치가 가장 빛날 때는 바로 생선과 고기를 절일 때이다. 만약 소금이 없다면 너무 쉽게 썩어버릴 식재료들이니까. - 55p
식욕은 17세기의 소금 같은 것이다. 소금을 빼앗고 통제하려는 염세리들을 피해 여자들은 소금덩이를 젖가슴과 젖가슴 사이, 코르셋의 꽉 끼는 틈, 그리고 허벅지 사이, 엉덩이 사이에 숨겼다. 염세리들이 신체의 그 특정 부분을 손가락으로 꽉 쥐면 여자들은 고통스럽게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 억지로 빼앗으려고 하면 더 숨기게 마련이다. - 98p
요리를 배우고 싶어하는 여자들은 넘쳐났다. 단순히 취미라기보다는 더 잘 먹는 것에 대한 관심이 커졌기 때문일 것이다. 요리를 잘한다는 건 남들보다 외국어 한 가지를 더 구사할 수 있거나 악기를 하나 더 연주할 수 있는 것과 비슷한 시대가 됐다. 차츰 남자 수강생들의 숫자도 눈에 띄게 늘기 시작했다. 요리를 잘하는 남자가 여자들에게 더 매력적으로 느껴진다는 게 그 이유였고 그것은 사실이었으니까. - 106p
고독이라든가 슬픔 혹은 기쁨 같은 것을 요리재료로 표현할 수 있다면, 고독은 바질이다. 위에 좋지 않으며 눈을 침침하게 하고 정신을 흐리게 한다. 바질을 빻아서 돌로 덮어두면 전갈이 몰려온다. - 31p
'노베'에서 '주꾸미 파스타'가 가장 많이 팔리는 것은 3월이다. 재료 준비를 다 끝내놓고 점심 손님들이 밀려오기 전에 한숨 돌리고 있다가 주꾸미 대여섯 마리를 끓는 소금물에 살짝 데쳐 초고추장 대신 바질 페스토에 살짝 찍어 한입 가득 넣었다. 물컹하지만 탄력이 느껴지고 바다 냄새가 입 안 가득 번졌다. 거기에 톡 쏘는 상큼한 바질의 맛이라니. 진짜 봄의 맛이다. - 82p
"사랑은 바질 같은 걸까, 삼촌?" "무슨 소리야?" "한 여자가 죽은 연인의 몸을 떠나보낼 수가 없어서 머리를 베어내서 바질이 심어진 단지에 묻었대. 여자는 눈물을 물처럼 주다가 찢어지는 마음을 가누지 못해서 결국 죽고 말아. 거기서 그 어느 때보다 크고 싱싱하고 향이 강한 바질들이 자라나기 시작해서 먼 곳에서부터 사람들이 찾아왔대. (중략) 사랑은 강력한 거야, 삼촌." "그래, 어쩌면." "바질에도 사람 마음을 어지럽히는 성분이 들어 있다잖아. 그러니까 한꺼번에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돼." - 278p
사소하지만 꼭 지켜야 할 규칙들이 이 비좁은 주방에도 엄연히 존재한다. 재료 담당 요리사가 이 주 만에 해고된 것도 이런 규칙들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칼로 일일이 저미고 채치고 다져야 할 마늘을 주방장 몰래 분쇄기에 넣고 갈다가 그만 아침 일찍 예고도 없이 불쑥 주방에 들어온 주방장에게 들키고 만 것이다. 이탈리안 요리에서 마늘은 없어서는 안 될 토마토만큼이나 중요한 요리재료다. 그만큼 하루에 쓰는 양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신선함과 마늘 특유의 톡 쏘는 향을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미리 찧어놓거나 한꺼번에 냉동시켜놓아서는 안 된다. 탁탁 때리듯 칼을 수평으로 눕혀서 두드리는 것은 괜찮지만 분쇄기를 쓰는 것은 금물이다. 기계에 넣는 순간 마늘의 향은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마늘의 고유한 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손으로 껍질을 까고 손으로 짓찧고 채썰어야 한다는 건 향신료를 다루는 데 가장 기초적인 상식이기도 하다. 마늘을 손으로 만지는 게 귀찮은 사람은 요리를 할 자격이 없다는 게 주방장의 원칙이다. 특히 갈색으로 윤기나게 구운 마늘은 더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을 내 '노베'에서 거의 모든 요리에 쓸 만큼 주방장이 아끼는 요리재료이다. 그걸 주방장 몰래 분쇄기에 넣고 간 건 와인이나 냉동육을 몰래 빼돌린 것보다 훨씬 더 나쁜 일이다. - 216p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