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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Fiction_소설

기나긴 이별

by nitro 2025. 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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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이별 /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김진준 옮김. 열린책들 (2020)

커피와 담배, 위스키와 권총이 어울리는 하드보일드 탐정의 대표자 "필립 말로"가 등장하는 소설.

클럽에서 만난 술친구를 도와 주면서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살인 사건에 휘말리게 된 탐정이 자신에게 씌워진 혐의도 벗고, 겸사겸사 진짜 사건의 내막도 파헤친다.

아무래도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의 시조격이다보니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데도 독자의 예상을 뒤엎기 억지 춘향식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게 장점.

소설 속에서 변호사가 "법은 정의가 아니오. 몹시 불완전한 체계란 말이오. 눌러야 할 단추를 또박또박 정확히 누르고 행운도 좀 따라 줘야 간신히 정의가 실현될까 말까요."라고 하는 부분에서 알 수 있듯이 자극적인 것만 추구하는 매스컴과 무능하고 폭압적인 경찰, 퇴폐적인 사회 풍조에 대한 비판 등을 통해 당시 사회상을 반영한다는 것도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 중의 하나.

개인적으로는 커피 강좌용 수업 교재 만들면서 찾은 책이라 소설 처음부터 끝까지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커피에 대한 이야기가 재미있다.

커피가 필립 말로와 다른 등장인물들의 관계나, 처한 상황의 분위기를 풀어내는데 꽤 큰 역할을 한다.

중간에 커피를 내리는 과정이 자세하게 묘사되는데, 지금은 멋 부리는 카페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사이펀(=베큠팟)을 사용한다. 미국에서 브루잉 방식의 전기 커피메이커가 확산되기 전에 주로 사용되던 물건인지라 이거 하나만으로도 1950년대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물씬 풍긴다.

마지막의 커피를 묘사하는 부분은 워낙 인상적이라 영어 원문을 찾아봤을 정도.

그는 블랙커피 한 잔만 달라고 부탁했다. 커피를 끓여줬더니 잔 받침을 컵 가까이 대고 조심스럽게 마셨다. "제가 왜 여기 있죠?" 그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댄서스 앞에서 롤스로이스를 타고 곯아떨어졌죠. 여자친구가 그냥 버리고 가던데요." "그랬군요. 버릴만하니까 버렸겠죠." -12p

"그래, 자네가 곤경에 빠졌다는 건 대충 알아차렸어. 우선 커피부터 두어 잔 마시고 나서 얘기해 보세. 잠을 막 깨면 언제나 머리가 좀 둔해서 그래. 우선 허긴스 씨와 영 씨-캘리포니아의 커피회사 <허긴스 앤 영 커피>를 의미한다-부터 만나 봐야겠어." (중략) 
나는 그렇게 수다를 떨다가 그를 혼자 두고 안쪽에 있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뜨거운 물을 틀어 놓고 선반에서 커피메이커를 꺼냈다. 유리 대롱을 물에 적신 후 커피를 재서 상부 유리병에 담았다. 그 사이 물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커피메이커의 하부 유리병에 물을 받아 불 위에 올려놓았다. 상부 유리병을 맨 위에 얹고 한 바퀴 돌려 고정시켰다. (중략) 나는 화장실에 가서 재빨리 세수를 했다. 부엌으로 돌아오기가 무섭게 타이머 벨이 울렸다. 불을 끄고 커피메이커를 식탁 위의 밀짚 받침에 옮겨 놓았다. 
이렇게 자질구레한 일까지 시시콜콜 늘어놓는 이유가 뭐냐고? 분위기가 너무 긴장돼서 사소한 일 하나하나가 연극의 한 장면처럼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커피가 다 내려오자 여느 때처럼 소란스럽게 공기가 쉭쉭 밀려들고 커피가 부글거리다가 이내 잠잠해졌다. 나는 커피 메이커의 상부 유리병을 떼어 내고 뚜껑 구멍에 꽂아 건조대에 놓았다. 커피 두 잔을 따르고 그의 잔에는 술을 섞었다. "테리 자네는 블랙으로 마셔." 내 잔에는 각설탕 두개를 넣고 크림도 넣었다. 이제야 긴장이 좀 풀리는 듯했다. 언제 냉장고를 열고 크림을 꺼냈는지 의식하지도 못했으니까.  -p42

"이 일도 나도 빨리 잊어버리게. 다만 그 전에 빅터 주점에 가서 김렛 한잔 마시며 내 명복을 빌어 주게나. 그리고 다음번에 커피를 끓일 때는 내게도 한잔 따라 주고, 버번도 조금 섞고, 담배 한 개비에 불을 붙여 커피 잔 옆에 놓아주게. 그러고 나서 다 잊어버려." -127p

로링 박사가 주머니에서 장갑 한 켤레를 꺼내 잘 펴더니 장갑 한 짝의 손가락 쪽을 잡고 웨이드의 얼굴을 힘껏 후려갈겼다. 웨이드는 외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새벽에 권총과 커피를 준비해서 만났으면 좋겠소?" 그가 조용히 물었다. -269p

“I went out the kitchen to make coffee - yards of coffee. Rich, strong, bitter, boiling hot, ruthless, depraved. The life blood of tired men.”
나는 부엌에 가서 커피를 끓였다. 잔뜩 끓였다. 진하고 독하고 쓰디쓰고 몹시 뜨겁고 무자비하고 사악하게. 피곤한 사람에게 활력을 주는 커피. - 482p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김렛에 관한 이야기도 꽤 애정을 갖고 묘사되어있다.

다음에 칵테일 이야기 할 때 써먹어야지, 라는 생각.

우리는 빅터 주점 구석 자리에 앉아 김렛을 마셨다. "이 동네는 제대로 만들 줄 모른다니까." 그가 말했다. "김렛이랍시고 라임 주스나 레몬 주스에 진을 타고 설탕이랑 비터스를 잔뜩 뿌려 내놓는단 말이야. 진짜 김렛은 진에 로즈사 라임 주스를 반반씩 타고 아무것도 섞지 말아야지. 그렇게 만들면 마티니 따위는 상대도 안되거든." (중략) 우리는 김렛 세 잔씩을 마셨다. 비록 더블은 아니었지만 테리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술꾼이 그만큼 마셨으면 제대로 발동이 걸릴 만한데. 정말 술버릇을 고친 모양이다. - 31p

"나는 이렇게 초저녁에 장사를 막 시작한 술집이 좋아. 실내 공기는 아직 선선하고 깨끗하지, 모든 게 반질반질하지, 바텐더는 마지막으로 거울을 보면서 넥타이는 똑바로 맸는지, 머리는 단정한지 확인해 보고. 바 너머에 가지런히 늘어놓은 술병도 좋고, 사랑스럽게 반짝이는 술잔도 좋고, 그때마다 느껴지는 기대감도 좋아. 바텐더가 그날의 첫 잔을 준비해 보송보송한 받침에 내려놓고 그 옆에 조그맣게 접은 냅킨을 놓아주는것도 좋아. 그 술을 천천히 음미하는 것도 좋아. 조용한 술집에서 그날의 첫 잔을 조용히 마시는 순간... 정말 근사하다니까." -p37

"이 동네는 그런 술을 마시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김렛 말이에요." "저도 어떤 친구 덕분에 좋아하게 됐어요." "영국인이겠네요." "왜요?" "라임 주스 때문이죠. 요리사가 거기에 피를 흘렸나 싶을 정도로 끔찍한 앤초비 소스를 넣어 끓이는 생선조림만큼이나 영국적이잖아요. 그래서 라이미라고 부르기도 하죠. 생선조림 말고 영국인을." 바텐더가 내 앞에 술잔을 내려놓았다. 라임 주스가 들어가서 빛깔이 푸르스름하고 노르스름했다. 맛을 보았다. 달콤하면서도 짜릿했다. -242p

여러모로 마초스러운 형사의 상남자스러운 모험담이라 재밌게 읽은 소설.

다만 아무래도 내 최애 탐정인 네로 울프를 이기기에는 역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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