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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무협&판타지

판타지소설 리뷰: 납골당의 어린왕자

by nitro 2021.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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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부터 추천글은 많이 봤는데, 주로 구독하는 웹소설 플랫폼에는 올라오지 않은 관계로 미뤄두었던 소설.

다 보고 난 후의 소감은, 그야말로 명불허전.

오래간만에 “소설을 읽기 전의 나보다 소설을 읽고 난 후의 내가 좀 더 발전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까지는 멀지 않은 미래, 우연의 결과물로 초고성능 인공지능이 탄생하고 그 인공지능 덕에 사람들은 뇌와 척수를 뽑아내어 가상현실 세계에서 영원히 살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언제나 옛 것을 고집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 국내의 한 재벌은 가난한 아이(의 부모)에게 돈을 주고 그 젊고 파릇파릇한 육체를 구입해서 자신의 정신을 옮겨담는다.

그리고 몸을 빼앗긴 아이, 겨울은 역병이 번지며 멸망이 다가오는 세계관의 가상현실에서 인터넷 방송(?)을 하며 세상을 구하는데…

이렇게 짧게 설명하면 흔하디 흔한 가상현실 게임 빙의물과 크게 다를 게 없어보이는데

실제로 읽어보면 토끼를 두 마리가 아니라 대여섯마리 한꺼번에 잡았다고 할 정도로 여러 장점이 눈에 띈다.

우선 재미. 기본적으로 웹소설이 추구해야 하는 가치는 재미, 더 나아가 독자에게 감정적 자극을 주고 만족감을 느끼게 할 정도의 뛰어난 재미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특수한 독자층에게만 재미를 선사하는, 이른바 호불호가 갈리는 작품이나 가능 독자층이 매우 좁은 작품들도 있지만 ‘납골당의 어린왕자’는 굉장히 많은 사람들에게 별다른 이견 없이 ‘재미있다’는 느낌을 받기에 충분해보인다. 게다가 연재 중에 단편적으로 끊어 볼 때 재밌는 것과 연재 후에 단행본 길이로 모아서 볼 때 재밌는 건 호흡부터가 다른데 양쪽 다 만족시키는 흔치 않은 글이기도 하다.

그리고 필력. 단순히 말초적인 재미로 인해 중독된 것처럼 다음 편을 찾게 만드는 것과는 달리 문학적 가치를 놓고 봤을 때도 굉장히 짜임새 있게 잘 쓴 글임을 부정할 수 없다. 현실 세계에 남아있는 주인공의 가족들과 몸을 빼앗아간 고건철 회장의 이야기, 그리고 현실과 가상현실의 중간계에서 벌어지는 고건철 회장의 딸과 주인공의 이야기, 주인공의 방송을 보는 시청자들의 반응, 사후세계를 관리하는 정치인들의 뒷이야기, 인공지능과 관리자와 주인공의 대화,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후 세계의 주인공이 역병과 맞서 싸우는 이야기까지. 크게 세 개로 나뉜 배경에서 서로 다른 이야기들이 이어지며 소설을 진행시켜 나간다. 여기에 제목에서 알 수 있듯 곳곳에 과하지 않게 집어넣은 어린왕자 모티브의 장치들, 그리고 작가 특유의 현실적인 세부 묘사와 생동감이 더해지며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몰입하게 만든다.

그리고 주제와 소재를 통해 ‘사는게 뭔가? 사람은 뭔가?’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고민하게 만든다는 점도 이 책을 높게 평가하는 이유다. 주인공이 가상현실 세계에 들어가 회차를 거듭하며 무작정 강해지고, 간단하게 세상을 구하는 게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확장팩을 구매해서 먼치킨이 되어가며 깽판을 치는 와중에도 자신이 만나는 상대를 진정한 인간으로 대하며 충실한 삶을 사는 주인공. 그리고 그 덕에 아직까지도 어지간히 돌아가는 천조국 정부의 협력체계가 서서히 세상을 구해나간다. 그 과정에서 국가와 개인의 관계, 삶의 연속성과 정체성, 정신과 육체의 상호 보완에 대해 깊은 사색에 잠길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깊은 생각하기 싫은 사람에게 억지로 들이밀며 강요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하고픈 사람만 빠질 수 있는, 자율성 넘치는 여지를 준다는 점에서 후한 점수를 줄 수 있을 듯.

원래는 지금의 결말이 아니라 새드 엔딩에 가까운 흐름이었는데, 중간에 작가가 대폭 수정하며 지금의 해피엔딩이 되었다는 말도 있다. 그런데 중간에 인공지능이 ‘외부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더미를 만들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어쩌면 작가가 처음에 쓰던 글이 진짜고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해피 엔딩은 수많은 시청자들이 훔쳐보던 더미 데이터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잡상도 떠오른다. 

총평: ★★★★★ 오래간만에 포식한 느낌. '별 다섯개? 다섯개 초반? 애매한데...'라는 느낌이 아니라 이리보고 저리봐도 목록의 제일 윗줄에 올려놓을만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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