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분야가 다르지만, 작가로 등단한 이력도 있고, 무엇보다 장르소설을 탐독한 지도 어언 20여년을 훌쩍 뛰어넘다 보니 ‘나도 판타지 소설 하나 쓰고 싶다’라는 생각이 무럭무럭 들 때가 있다. 소설에 녹여 넣을 주제도 있고, 써먹을 만한 소재도 있고 캐릭터도 여럿 등장해서 머릿속을 뛰놀고 있건만 선뜻 시도하지 못하는 이유는 한 가지. 내가 봤을 땐 굉장히 잘 쓴 소설들이 모래바람에 파묻히는 고대 유적처럼 그 화려함을 제대로 보여주지도 못하고 묻혀 사라지는 것을 자주 보아왔기 때문이다. 웹소설 플랫폼 특성상 진입 장벽이 없다싶을 정도로 낮고, 그러다보니 제목부터 소설 초반부까지 자극적인 내용으로 떡칠을 하며 소위 ‘어그로’를 끌어도 운이 없으면 살아남기 힘들 지경이니, 많은 사람이 “웹소설판은 운칠기삼”이라고 자조 섞인 탄식을 내뱉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강과 먼지의 왕자는 ‘이런 소설도 묻히는 판에 내가 어찌 감히’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글 중 하나다. 고대 로마의 평행세계 버전 쯤 되는 “공화국”이 변경의 야만인들을 평정하러 나서고, 그 과정에서 역습을 받아 지리멸렬하게 흩어지는 병사들에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전리품을 다 잃어버린 탓에 빈털터리로 전락할 위기에 처한 병사들이 용기를 내어 장군을 구출하고, 큰 패배로 인해 정치적 입지가 위태로워진 장군은 자신의 부하들을 추스리고 정치와 외교를 섞어가며 복귀를 꿈꾼다. 승리를 거둔 이민족의 내부 사정은 또 그 나름대로 급박하게 돌아가고, 권력을 잡으려는 (혹은 놓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면서 공화국과 “녹색 땅”, 그리고 그사이에 낀 요새 도시 “붉은 방패”를 오가며 이야기가 흥미롭게 전개된다.
보통 리뷰를 쓸 때면 도입부를 소개하고 큰 줄거리를 간추리면 되는데, 이 소설은 워낙 여러 갈래의 이야기가 동시에 전개되기 때문에 요약도 쉽지 않다. 소설의 수준과는 별개로 구조가 복잡하면 읽을 때는 흥미진진해도 짧은 한두 문장으로 전체를 묘사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반지의 제왕”에 비하면 “왕좌의 게임”의 내용을 요약하기가 훨씬 더 힘든 것과 비슷한 느낌이랄까. 여러 인물을 번갈아가며 시점이 바뀌기 때문에 (다중 삼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 안그래도 규모가 큰 소설인데 훨씬 더 힘을 들여 읽어야 한다. 그래서 일반적인 장르 소설 읽는 느낌으로 읽다 보면 금방 지치는 게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흥미진진한 이유 중의 하나는 등장인물들이 하나같이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출세에 목이 마른 기회주의자이면서도 언제나 예의 바르고 상대를 존중하는 탓에 속에 뭐가 들었는지 예측할 수가 없는 다레온, 시저를 모델로 했지만 허술한 인간적 모습이 많이 드러나는 탓에 오히려 그 날카로움이 더 선명하게 느껴지는 은화장군 페로스, 다른 소설이었다면 성격 나쁜 만능형 주인공 정도는 했을 법한 시리온, 불우한 과거를 가진 라기아족의 영웅 베르겐까지. 여기에 조연급에 해당하는 인물들의 사연도 뭐 하나 빠트릴 게 없는 탓에 긴 호흡으로 읽어야 함에도 홀린 듯 뒤편을 계속 읽게 된다. 게다가 선정성과 폭력성이 여과없이 드러나는 줄거리에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더해지면 ‘이러다 누구 하나 죽어나가는 거 아닌가’라는 왕좌의 게임 증후군이 도지는 탓에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고 보는 중이다. 아직까지는 “얘를 여기서 이렇게 죽인다고?!”라며 놀라거나 분개할만한 장면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전작을 보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만큼 잔인해질 수 있는 작가이기에 방심은 금물.
“일 년 전만 하더라도 이곳은 남자 거시기나 자르던 미친 창녀들의 소굴이었고, 이 거리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어. 하지만 지금은 어떻지? 더할 나위 없이 멋지고, 또 신의 의지에 부합하는 성스러운 곳이 됐지.”
“신의 의지에 부합하고 성스럽다고? 여기, 도대체 어디가?”
“남자가 여자를 때려 패고, 여자는 공포에 떨며 질질 울잖아? 그게 바로 신의 의지에 부합한 거지. 그게 아니면 남자가 여자보다 힘센 이유가 뭐겠어?”
“오, 신이시여. 이놈을 지옥에 끌고 가 주소서.”
“나한테 강간당한 여자들이 다들 그렇게 말하더라.”
워낙 캐릭터 성이 뛰어나기에 등장인물들만 마음껏 날뛰게 놔둬도 이야기가 진행될 것 같은데, 여기에 작가 특유의 디스토피아적인 묘사가 더해지면서 묘하게 현실감까지 갖게 되는 것 또한 이 글의 장점이다. 굳이 설명충 스피드웨건이 등장하지 않아도 소설에서 묘사하는 장면이 저절로 상상되며 머릿속에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물론 여기에는 드라마 “Rome”이나 “왕좌의 게임” 내지는 영화 “글래디에이터”처럼 이미 영상화된 작품들의 도움이 크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바투같은 개짓거리하는 인물에게는 자연스럽게 싸이코패스 램지 볼턴의 얼굴을 가져다 붙이게 된달까. 표절은 아니지만, 전반적인 분위기에 유사점이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이는 달리 말하면 글을 읽다 보면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Rome”이나 “왕좌의 게임”이 떠오를 만한 급이 된다는 소리이기도 하다. 글을 개판으로 써놓으면 유명한 작품을 그대로 베껴도 알아차리기 힘든 반면, 글을 잘 쓰면 그와 비슷한 레벨의 영화, 드라마, 게임 등의 이미지가 나도 모르게 섞이곤 하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야기의 스케일이 대단히 크다는 것 역시 마음에 든다. 이야기의 스케일이 크다는 건 단순히 무대가 넓어지거나 머릿수가 많아지는 개념과는 다르다. 소설이 진행되며 여러가지 사건들이 넉넉하게 일어나고 이에 대한 묘사가 충실하며 인물들의 대사가 탄탄하게 받쳐준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수백 개의 왕국과 수십만 명의 병사가 등장하는 이야기라도 투명 드래곤이 한 번 울부짖어서 평정한다면 스케일이 크다고는 할 수 없다. 반면, 붉은 방패라는 조그만 요새 도시 하나를 두고도 과거의 총사령관과 현재의 임시 총독과 변경 귀족 부스러기들과 뒷골목 깡패들이 얽히고설키며 다채로운 사건과 인간관계를 만들어 낸다면 그 이야기는 굉장히 풍성해진다. 문제는 이게 부담없이 가볍게 읽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쥐약이나 다름없는지라 이 소설이 순위권은커녕 유료화도 안 되는 큰 원인 아닐까 싶다는 거지만. 오죽하면 작가가 의도적으로 힘 좀 빼고 가볍게 연재했던 글이 더 인기를 끌었을까.
전반적으로 봤을 때 굉장히 잘 쓴 글이고, 재미있는 이야기고, 생동감 넘치는 인물들이다. 누가 봐도 고대 로마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지명과 세부 묘사를 약간씩 비틀어 버리면서 현실 고증의 굴레에서 벗어나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펼치고 있다. 혹자는 작가 특유의 적나라한 시궁창 묘사가 더러워서 못 보겠다고도 하지만, 시궁창을 묘사하는데 꽃향기가 나면 그것도 이상한 법. ‘기생충’이나 ‘조커’가 보고 나면 기분이 더러운 것과는 별개로 잘 만든 영화인 것처럼, 이 소설에 등장하는 기분 언짢아지는 장면들 역시 독자가 그렇게 느끼기를 바라는 명확한 목적을 갖고 배치되었기에 빛을 발하는 것 아닌가 싶다.
딱 한 가지 걱정되는 점이라면 2020년도 다 저물어가는 현재 243화까지 연재 중임에도 불구하고 유료화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쯤 되면 작가가 “이왕 이렇게 된 거, 돈과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내 필생의 역작을 만들겠다!”라는 각오를 하지 않고서야 언제 연재 중단이 되어도 이상할 게 없을 지경이다. 그렇기에 무사히 완결까지 나와서 끝을 볼 수 있기만을 바라는 작품이기도 하다. 맛없는 코스 요리는 중간에 냅킨 던지고 뛰쳐나와도 되지만, 맛있는 코스 요리가 중간에 끊기면 그만큼 비극적인 일은 또 없으니까.
총평: ★★★★★ 제발 완결까지 나기만 바라는 작품. 호흡이 긴 이야기는 지쳐서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비추. 왕좌의 게임이나 Rome을 재미있게 본 사람이라면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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