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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무협&판타지

판타지 소설 리뷰: 시하와 칸타의 장 - 마트 이야기

by nitro 2020. 1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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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올리는 소설 평가를 보면 남들에게 공감받기 힘든 가점 요소가 하나 있는데, 바로 “소설의 영향력”이다. 글 자체의 재미나 필력, 감동, 교훈 같은 요소도 물론 중요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소설이 이후 문학계에 (그리고 사회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도 그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사회를 바꿀만한 영향력을 가진 작품을 만나기란 쉽지 않은데, 하늘아래 완전히 새로운 것이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수많은 창작물들이 이미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드래곤 라자는 아직도 내 리스트의 (그리고 수많은 판타지 소설 팬들의 리스트의) 상위권을 고수하고 있다. 지금 다시 읽어보면 타자의 후기 작품에 비하면 여러모로 격이 떨어지는 글이고, 요즘 쏟아져나오는 여타 소설들과 비교해봐도 참신성이나 구성 면에서 엄청나게 뛰어나다고 보긴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단순히 ‘그 당시엔 이 정도면 최고였어!’라는 과거의 향수에 매몰된 게 아니라 그로 인해 한국의 환상문학계에 새로운 흐름이 열렸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 속단하기엔 이르지만, 그래도 이영도 작가 정도면 이제 슬슬 이쪽 분야에서는 ‘거장’의 타이틀을 달지 않겠나 싶다. 그렇기에 많은 팬들은 그의 동향을 기웃거리며 “타자야 타자야 다음 글을 내놓아라. 내놓지 않으면 과수원을 구워 먹으리”라는 농담을 주고 받는 지경에 이르렀고. 하지만 이런 반응을 아는지 모르는지, 작가는 내놓으라는 “독을 마시는 새”는 안내놓고 단편, 중편만 주구장창 찍어내는 만행을 부리는 중이다. “마트 이야기 - 시하와 칸타의 장” 역시 이영도 작가의 수많은 중편 소설 중 하나. 그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이 이야기는 뭔가 커다란 세계관을 공유하는 여러 편의 이야기 중 하나가 될 거라는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는 있는데, 작가의 취미가 현실에 존재하는 이런저런 환상기담을 뭉뚱그려 자기만의 색깔로 녹여내는거라 마트 이야기가 독립된 하나의 장편 소설로 나올지는 미지수다.

  내용은 크게 대단할 것 없는 이야기다. 인류는 멸망 직전에 이르러, 산소호흡기 달고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기 직전인 환자 신세. 그리고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헛것이 보인다는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 드래곤과 요정을 비롯한 온갖 상상의 산물들이 현실에 나타난지도 오래다. 드래곤이 보호하는 동물원을 집으로 삼는 소녀 시하가 쥐덫에 걸린 요정을 발견하고, 소년 칸타는 기록자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마트로 떠나고, 간달바들은 압사라 무희를 위해 마트를 공격할 예정이고, 마트퀸은 파일럿 수트에 선녀옷을 겹쳐입고 날아다니고, 캇파가 날뛰고, 스바딜파리는 달린다. 내가 봐도 이게 뭔 소린가 싶지만 아무리 애써서 요약을 해도 약 한 사발 거하게 들이킨 사람의 헛소리로만 들리게 만드는 게 이영도 세계관의 특징이니 어쩔 수가 없다.

  실시간으로 망하는 중인 이 세계에서 후손을 남긴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먹기는 자기가 처먹고 지불은 남에게 떠넘기는” 짓에 불과한 상황.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사랑은 꽃피고, 이야기는 계속된다 (아마도?).

   나는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지만 ‘꽤나 호불호가 갈리겠다’싶은 생각이 든 소설이기도 하다. 작가는 독자들 역시 세상에 존재하는 각종 신화와 설화를 다 섭렵했을거라 생각하는지, 핵심 환상종이나 작품들에 대한 설명을 홀라당 빼버렸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투란도트, 칼레발라, 캇파, 간다르바, 스바딜파리, 소마, 베탈라가 뭐하는 것들인지를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어릴 적 단어의 뜻을 몰라 그림책 못 읽어서 갑갑하던 심정을 오래간만에 다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작가가 예전부터 즐겨 써먹어왔던 소설적 장치이지만 단편이나 중편에서 써먹기엔 너무 심한 거 아닌가 싶다.  220여페이지에 달하는 책이라지만 한 시간여만에 홀딱 읽어치운 것을 보면 흡입력은 여전히 살아있다. 하지만 눈마새와 피마새에서 느꼈던 “아, 뭔가 대단한 것을 봤다”는 감동은 찾기 힘들다. 

  물론 지금도 실시간으로 네트워크를 잠식하는 불쏘시개도 되지 못할 망작들이 넘쳐나는 상황에서 상대평가를 하자면 굉장히 뛰어난 수작이다. 하지만 최고급 스포츠카를 사면서 보급형 소형차와 비교하는 사람은 없다.

총평: ★★★☆☆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생소한 관념을 늘어놓고 새로운 세계관을 강요하는 것이 이영도 스타일이긴 하지만 그게 너무 지나친 나머지 '아는 사람만 알고 웃을 수 있는' 소설이 된 듯한 느낌. 장편을 써라, 장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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