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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Nonfiction_비소설

위, 셰프

by nitro 2022. 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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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셰프 / 마이클 기브니 지음, 이화란 옮김. 처음북스 (2015)

가끔 요리학교를 졸업한 것이 내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돌아볼 때가 있다.

직업적인 측면에서 접근했을 때 얻게 된 이득도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보다 더 큰 것은 역시 레스토랑 주방이라는 또 다른 세계에 발끝이나마 담궜다는 것 아닐까 싶다.

이 책은 뉴욕의 수많은 레스토랑 중 한 곳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다.

원래 제목인 '수셰프'가 의미하듯, 책의 주인공은 레스토랑 주방장의 바로 아래 부주방장으로 일하며 위로는 각종 주문과 지시를 받아들이고, 아래로는 사람들을 관리하고 일의 흐름을 통제하며 급한 경우엔 직접 전선으로 뛰어들어 요리를 한다.

아마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이 책이 그렇게 와닿지도 않고 재미도 없을 수도 있다. (아닌가? 한국어 번역판이 나올 정도라면 의외로 인기가 많았을 수도 있을까?)

하지만 내게는 마치 내가 여행한 적이 있는, 혹은 내가 살아본 적이 있는 외국의 이야기를 다른 누군가에게서 듣는 느낌이다.

책 맨 뒷부분의 20페이지가 넘는 요리 용어 주석을 따로 펼쳐보지 않아도 모든 단어를 다 알아들을 수 있다.

심지어는 번역된 단어를 보곤 '이건 원래 XX을 번역한 거겠구만'이라고 짐작도 가능하다.

책에서 묘사되는 주방의 전경이, 요란한 소리와 음식 냄새가 만들어내는 전쟁터가 눈에 선하다.

8시. 쇼타임이 시작됐다. 입이 바짝 마른다. 프린터가 윙윙 작동을 시작한다.
"모두 듣고 있나?" 셰프가 외친다. "자, 시작하지. 주문, 청어 2개, 아뇰로티 1개, 타르타르 1개. 그 다음은 가자미 2개, 꽃등심 미디움 레어 1개."
"위, 셰프!"
"그리고... 17번, 9번, 32번, 47번을 픽업할 거네."
"위, 셰프!"
"4분!" 줄리오가 말한다.
"4분!" 메아리가 울려퍼진다.

 

아... PTSD오는 그리운 소리. 

주문 프린터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스테이션에 대기하고 있으면, 마치 지축을 올리며 달려오는 기병 앞에서 방패벽 세우고 기도하는 병사의 심정이 된다. 프라이팬으로 만든 초라한 방패벽.

레스토랑 뒷편의 세계에 대해 모르는 사람을 위해 설명하자면, 지금 식당에 두 그룹의 손님이 들어와서 주문을 남겼다. 한 테이블은 청어 요리 두 접시, 파스타 한 접시, 육회 한 접시를 주문했고, 다른 한 테이블은 가자미 두 접시, 꽃등심 한 접시를 주문했다. 하지만 셰프가 "주문"이라고 말한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지금 당장 나갈 음식이 아니라 손님들이 애피타이저를 먹고 나서 메인 디쉬로 나갈 음식들이니 일단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뜻이다.

반면 17번, 9번, 32번, 47번을 픽업한다는 말은 이전에 들어온 손님들이 애피타이저를 다 먹어가니 요리를 낼 준비를 하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시간이 많이 걸리는 요리- 주로 생선이나 스테이크 -를 담당한 요리사(이 경우에는 줄리오)가 자신의 요리가 준비될때까지 걸릴 예상 시간을 외친다. "4분!" 그러면 해당 주문의 다른 요리를 맡은 요리사들이 "4분!"이라고 따라 외치며 자기 요리를 그 시간에 맞춰 낼 수 있도록 페이스를 조절한다. 그렇지 않으면 옆 사람이 따뜻한 스테이크를 먹는 걸 보며 다 식어빠진 파스타를 먹는 손님이 생길 수도 있으니.

문제는 소설 속에서 이러한 정황을 아주 세세하게 설명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서너번 계속 읽다보면 이해가 될 수도 있으나, 대부분은 이런 복잡한 속사정과 외계어처럼 들리는 요리 용어의 범람에 익사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나름 업계 물이 좀 들었던 내게는, 200명의 손님이 들이닥쳐 미친듯이 스테이크를 구워야 했던 즐거운(?) 추억을 되살릴 수 있는 재미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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