밸런타인데이의 무말랭이 /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문학동네(2023).
삼십 년에 한 번밖에 우승하지 않는 팀을 응원하노라면, 딱 한 번의 우승으로도 오징어를 질겅거리듯 십 년 정도는 즐길 수 있다. 참으로 고마운 일입니다. - p.19
바다가 보이는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먹거나 하면 정말이지 행복하다. 도쿄에는 바다가 없고 (있긴 하지만 그건 바다 축에 끼지도 못한다) 쇠고기도 비싸다. 유감천만이다. 이따금 바다가 그리워지면 쇼난이나 요코하마에 가는데, 뭔가 마음에 차지 않는다. '일부러 바다를 보러 예까지 왔습니다'하는 느낌이 앞서기 때무이다. 바다 쪽도 '여, 이것 참 잘 오셨습니다'라는 듯한 느낌이다. - p.26
내 경험으로 봤을때 절대로 고용해서는 안 되는 타입이 몇 있다. "급료는 안 주셔도 좋으니까 일하게만 해주십시오"하는 타입도 그중 하나다. (중략) 비슷한 경우로 나는 원고료를 못 받는 원고는 절대 쓰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일하다보면 '그 사람은 돈에 까다롭다'는 얘기를 듣기도 한다. - p.41
역 근처에 열다섯 평에서 스무 평 남짓의 좀 세련된 가게를 열려면 최소한 2천만 엔 정도는 필요하지 않을까? 2천만이란 아무리 생각해도 평범한 젊은이가 모을 수 있는 금액은 아니다. 요즘 세상에 '돈도 없지만 취직도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가진 젊은이들은 대체 어떤 길을 걷고 있을까? 빠져나갈 길이 많으면 많을수록 살기 좋은 사회라고 나는 생각한다. - p.79
집으로 돌아와 무말랭이를 한 시간 정도 물에 불렸다가 참기름으로 볶고, 거기에다 튀긴 두부를 여덟 조각으로 썰어넣고, 맛국물과 간장과 설탕과 미림으로 양념한 후, 중간 불에 부글부글 조린다. 그사이 카세트테이프로 B.B.킹의 노래를 들으며, 홍당무와 무채 초무침을 만들고 무청과 유부를 넣은 된장국을 끓인다. 그러고 나서 맨두부를 끓는 물에 살짝 대쳐놓고 도루묵을 굽는다. 이것이 그날의 저녁식사였다. 그걸 먹으면서 문득 생각났는데, 2월 14일 오늘은 밸런타인데이다. 밸런타인데이란 여자가 남자에게 초콜릿을 선물하는 날이다. 그런 날 저녁에 나는 어째서 제 손으로 만든 된장국을 훌훌 마시고, 제가 만든 무말랭이 조림을 먹어야 한단 말인가? 이런 생각이 들자 내 인생이 한심스러워졌다. 아내조차 시큰둥하게 "밸런타인데이? 흠, 그래"하면서, 내가 만든 무말랭이 조림을 묵묵히 먹고 있다. - p.104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은 이상하게 읽을 때마다 뭔가 약간 목에 걸리는 듯 잘 넘어가질 않는데 에세이는 술술 잘 넘어간다. 특히 음식이나 술 이야기가 나오는 글은 그야말로 취향 저격인 것이, '야, 이 아저씨도 나랑 비슷한 사람이구만!'을 연발하게 만드는 묘사가 연달아 나오기 때문이다.
하긴, 음식 이야기 중에 내가 안 좋아하는 것이 있으랴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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