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가장 좋아했던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꼽으라면 언제나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스누피다. 대사 한 마디 없으면서도 전투기 조종사, 작가, 멋쟁이 조 쿨, 잼보니 운전수, 보이스카웃 대장, 그리고 본업인 조금은 건방진 애완견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다양한 모습으로 변신하며 자기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하는 그 모습이 매력적이었다고나 할까. 어떤 면에서 보면 여자아이들이 마법소녀 밍키를 좋아하는 이유와 비슷한 맥락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스누피와 우드스탁 외의 캐릭터들에게는 그닥 정감이 가지 않았는데, 워낙 어린 나이였기 때문인지 다양한 캐릭터들이 만들어 내는 나름 복잡한 인간관계와 심리상태를 이해하는게 너무 어렵고 재미없어서였다고 기억한다. 특히 찰리 브라운의 그 소심하고 어리버리한 성격을 보고 있노라면 괜히 갑갑한 느낌이 들 정도였으니. 나만 이렇게 느꼈던 건 아닌지, 미국에서는 영화 제목이 “더 피너츠 무비”인데 우리나라에서는 그 앞에 스누피를 내세운다.
조금 더 나이를 먹은 후에는 가필드의 냉소적이고 게으른 컨셉에 푹 빠져버린 터라 피너츠 갱들과는 거리가 멀어졌는데, 이들을 다시보게 된 것은 영어 공부를 위해 10권짜리 영한대역 만화책을 구입하면서 부터였다. 단편 애니메이션에는 다 담아내지 못했던 소소한 일상을 보며 스누피 뿐 아니라 찰리 브라운과 그 주변 인물들까지 애정을 갖게 되고, 그들이 만들어 내는 따뜻한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었다.
그래서 이번에 개봉하는 더 피너츠 극장판을 보기 전에는 나름 걱정이 가득했던 것이 사실이다. 4컷만화 기반의 오리지널 원작을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재탄생 시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고, 자칫 잘못하면 가필드 극장판 꼴이 나지 않겠나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극장판은, 비록 엄청난 수준의 명작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원작이 주는 가슴 뭉클하고 따뜻한 감동을 주는 데는 성공했다는 느낌이다. 사실 피너츠 원작이 주는 감동이라는 게 워낙 소소한 까닭에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더 잘 어울리는 듯.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큰 줄거리는 있지만 그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이 옵니버스식 구성으로 이어지는 다양한 사건들의 연속인지라 걱정했던 것 만큼 지루하지는 않았다. 이야기의 스케일이 작다는 게 이런 경우에는 또 장점인데, 여러 이야기를 늘어놔도 난잡하게 느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눈이 내려서 휴교하거나, 전학생이 오거나, 연이 나무에 걸리거나, 쪽지 시험을 보거나 하는 소소한 일들이 전부.
하지만 그 와중에도 어른스러우면서도 아이같은 이중성을 보여주는 등장인물들은 어느 새 나도 모르게 아빠미소를 짓게 만든다. 짝사랑 문제로 고민하는 찰리 브라운에게 자기계발서를 건네는 루시는 천진난만함과 거리가 멀지만, 상담료로 받은 5센트 동전 한 닢에 진심으로 기뻐하며 깡통을 흔들어대는 모습은 그야말로 어린아이 답다. 좋아하는 소녀에게 춤 한 번 추자는 말을 못해서 댄스 대회 우승을 목표로 연습을 하는 찰리 브라운의 모습은 어찌 보면 안쓰럽지만, 대회에서 쭈볏거리다가 결국 신나게 춤을 추는 그 모습을 보면 내 마음 한 구석이 따뜻하게 녹아내리는 기분도 든다.
그리고 마지막 이야기가 끝나고 그 여운이 잔잔하게 가슴에 남는 것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왠지 나이 든 웬디가 피터 팬을 바라보며 미소지을 때의 심정이 이해가 될 것도 같다.
하지만 이 기분이 과연 나만 느끼는 것인지 아니면 상대적으로 피너츠와 함께 유년 시절을 보낸 사람이 적은 우리 나라에서도 이렇게 추억에 젖는 사람들이 많을지, 그리고 빵빵 터지는 웃음과 화려한 내용에 익숙해진 요즘 아이들에게도 스누피가 친근하게 느껴질지는 한국에서 개봉해 봐야 알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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