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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Fiction_소설

민음사 세계문학 전집: 케이크와 맥주

by nitro 2024.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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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크와 맥주 / 서머싯 몸 지음, 황소연 옮김. 민음사(2021)

성가시게 굴고 싶지 않지만 평론가께서 수요일이나 금요일에 용무가 없으시다면 사보이 호텔에서 같이 점심을 들며 제 책의 정확히 어느 부분이 좋지 않은지 말씀해 주실 수 없겠는지요? 로이보다 점심을 더 맛있게 주문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평론가는 생굴을 대여섯 개 삼키고 어린 양고기의 등심을 한 조각 먹고 나면 대개 본인이 뱉은 말까지 같이 삼키게 된다. 이후 로이의 다음 소설이 나왔을 때 그 평론가가 로이의 차기작에서 커다란 진전을 발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시적 정의라 하겠다. -p.22
"송아지 고기와 햄을 넣은 파이를 추천하는 바네." 로이가 말했다.
"그걸로 하지 뭐."
"내 샐러드는 내가 섞도록 하지." 그는 웨이터에게 무뚝뚝한 명령조로 말하고는 메뉴판을 다시 훑어본 뒤 상냥하게 덧붙였다. "그다음엔 아스파라거스 어때?"
"괜찮겠군."
그의 태도에 위엄이 조금 더해졌다.
"아스파라거스 이인분 주되 주방장에게 직접 고르라고 하시오. 마실 것은 무얼 할 텐가? 혹Hock 한 병 어때? 여기 혹이 아주 괜찮아."
내가 동의하자 그는 웨이터에게 와인 담당자를 불러 달라고 했다. 나는 권위적이면서도 완벽하게 예의를 차려 주문하는 그의 태도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예절 바른 국왕이 육군 원수를 소환하는 장면을 보는 듯 했다. (중략)
"안녕하세요, 암스트롱. 21년산 립프라우밀히 있으면 줘요."
"그러죠, 선생님."
"재고는 좀 어떤가요? 넉넉하죠? 더 구하기는 힘들 겁니다."
"유감이지만 그렇습니다, 선생님."
"지레 걱정해 봐야 무슨 소용이겠소, 안 그래요, 암스트롱?"
로이는 와인 담당자에게 유쾌하고 따스한 미소를 지었다. -p.34
"노년의 드리필드는 아주 별스러운 기벽을 가지고 있어서 점잖게 행동하도록 단속하려면 요령이 아주 많이 필요했던 모양이야. 가엾은 에이미는 그 양반의 습관을 고치느라 엄청 애를 먹었다고 하네. 고기와 채소를 먹고 나서 빵 조각으로 접시를 싹싹 닦아 먹는 버릇이 있었어."
"왜 그랬는지 아나?" 내가 말했다. "하도 오랫동안 굶주리면서 산 탓에 음식 한 톨 낭비할 수가 없었던 거야."
"뭐, 그럴 수도 있지만 유명한 문인의 습관치고는 보기에 좋지 않지." (중략)
"신사와 작가 노릇을 동시에 하는 건 어려운 일이야." -p.155
한 조간신문에 격렬한 비판이 실렸다. 그 책에 관한 칼럼이었다. 칼럼은 쓸데없이 불쾌하고 음란한 책이라며 이런 것을 대중에게 내놓았다고 출판사를 꾸짖었다. 그리고 영국의 젊은이들에게 미칠 해로운 영향력과 그것이 도출할 참상들을 나열했다. 또한 여성을 모독하는 책이라고 판단했다. (중략) 그야말로 파란을 일으켰던 책을 이제 와 읽어 보면 야릇한 기분이 든다. 순진한 사람이 얼굴을 붉힐 만한 말은 어디에도 없고 오늘날의 독자들이 기겁할 만한 사건 하나 찾아볼 수 없으니 말이다. -p.228

작가의 삶에 대한 이야기인데 제목이 케이크와 맥주. 안 볼 수가 없다! 

잘나가는 작가 친구인 앨로이가 더 잘나가던 (하지만 얼마 전에 죽은) 작가인 드리필드의 회고록을 쓰기 위해 주인공이자 화자인 어셴든을 찾아오고, 어셴든의 어릴적 및 청년 시절을 보내며 맺었던 드리필드와 그 부인인 로지와의 추억을 떠올리게 된다. 소박한 시골인 블랙스터블과 화려한 런던의 사교계를 배경으로 묘사되는 문인들의 사고방식과 생활상. 그리고 서머싯 몸의 소설답게 어김없이 빠지지 않는 나쁜 여자.

당시 영국 문단의 유희와 쾌락을 좆던 풍조를 묘사하고 그 덧없음을 일깨운다고 하는데, 워낙 이보다 더 자극적이고 쾌락주의적인 요즘 세태에 눈높이가 맞춰져서인지 아니면 서머싯 몸의 글에 등장하는 여인들-인생의 베일이나 인간의 굴레에서를 들 수 있겠다-에게 하도 호되게 당한 탓인지 별로 매운맛으로 느껴지지도 않는게 재밌다.

개인적인 감상이라면 "예절 바른 국왕이 육군 원수를 소환하듯" 주문을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고, 스카르페타(빵으로 소스를 훑어먹는 것)가 "문인의 습관치고 보기에 좋지 않다"는 구절이 충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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