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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무협&판타지

전직 폭군의 결자해지

by nitro 2018. 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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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결자해지" 부분만 눈에 띄게 강조했을 정도로 제목이 안티 소리를 듣는 대체역사물, 전직 폭군의 결자해지.

하지만 생각해보면 눈에 띄면서 그럴듯한 제목을 짓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닌지라, 무난하게 '천몽' 이런 제목을 붙였더라면 더 눈에 띄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도 한다.

중학생이 우연히 얻은 '천몽'이라는 제목의 책. 

그 책을 열고 나서부터 주기적으로 꿈을 꾸게 되는데 그 속에서는 아주 오랜 옛날, 어떤 부족장의 아들로 태어나 또 하나의 삶을 산다. 

당연히 꿈이라 생각하고 하고 싶은 일들을 다 하면서 지내다가 부족장으로서의 인생을 마감하는데, 그 순간 갑자기 현실이 바뀌어 버린다.

꿈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알고 보니 실제 과거 역사였고, 자신이 행한 일들로 인해 원래 역사가 뒤바뀌며 천몽이 끝나자 현실이 한꺼번에 업데이트 된 것.

원래는 강대국이었던 나라가 자신의 분탕질로 인해 수많은 외세의 침략을 겪고 분단되어버린 것에 책임을 느끼던 주인공, 몽주.

과거를 바로잡기 위해 천몽이라는 책을 찾아 여기저기 수소문해보지만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한 채 대학생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그제서야 다시 나타난 천몽. 하지만 이번에 꿈 속에서 돌아간 곳은 망조가 단단히 든 고려 말. 어떤 부잣집의 아들로 바뀐 삶을 살게 된다.

현대의 지식을 이용해 고려에서 성공하고, 잠에서 깨면 고려에서 있었던 일을 분석하고 해결책을 찾아 다시 꿈을 꾸며 승승장구하는 이야기.

이렇게 서술하면 왠지 흔하디 흔한 대체역사 소설같지만, 뛰어난 고증과 연속되는 위기는 금세 이야기에 빠져들게 만든다.

무엇보다도 "아무리 뛰어난 지식이라도 사회가 그 지식을 받아들일만큼 성숙하지 않았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작가의 철학이 잘 녹아난 전개가 마음에 든다.

보통 대체역사 소설이라면 현대의 지식을 활용해서 비료도 만들고 화약도 만들고 의약품도 만들고 뚝딱뚝딱 기술 발전에 평등 사상 전파에 교육 혁신을 이뤄가며 다른 나라들 잡아먹는 전개가 일반적인데 이 소설은 그런 사고방식을 단번에 깨부순다.

실제로 소설 내에서 주인공의 컨설턴트 격으로 등장하는 소설가의 대사가 이를 잘 나타내고 있다.

"캬아, 지식. 고려 말이니까 지금이랑 거의 7백년 차이죠? 

그 시간만큼 지식의 간격이 벌어져 있으니, 이야, 잘만 사용하면 정말 대단할 것 같죠? 

그런데, 그 수백년의 차이만큼 지식 수준이 벌어졌다는 건, 그 현대인의 지식이 수백 년 앞서 있다는 의미일까요?

전 그것이 수백년만큼 단절되었다는 의미라고 봅니다. (중략)

현대인이 나는 비누를 만들어 쓰겠다고 마음먹었다고 칩시다. 심지어 그 현대인은 비누를 만드는 법까지 알고 있다고 칩시다.

자, 세안용 비누를 만들기 위해서는 수산화 나트륨이 필요하고, 수산화 나트륨을 얻으려면 소금물을 전기분해.. 벌써 딱 막히네요.

그럼 발전기를 만들어야 겠군요. 일단 영구 자석이 필요하겠네요. 영구 자석은 또 어떻게 만들죠?

뭐, 어떻게 해서든 그 시대에는 없는 정말 쓸만한 문명의 이기를 만들어냈다고 칩시다. 

심지어 적절하게 많은 양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치죠. 남는 결과는 셋 중 하나입니다.

다른 하위호환되는 대체품 때문에 생산가 이하로 팔 수밖에 없어 망하거나,

다행히 잘 팔리지만 부작용으로 인해 고발당해 매질당하거나

그에 눈독들인 권력에게 트집잡히고 붙잡혀 기술을 토해내야겠죠. 아니면 노예가 되어 평생 그것만 만들거나."

그야말로 "비따비" 프롤로그에서 "과거로 돌아가면 열심히 공부해서 서울대 들어가고, 오를만한 주식 미리 사뒀다가 재벌 될 거 같지? 실제로는 어림도 없어."라고 일침 놓는 것을 볼 때의 기분이다.

결국 주인공은 얼마 안 되는(?) 재산을 바탕으로 현대의 지식을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신돈의 휘하에서 이래저래 죽을 고생 다 해가며 힘을 기르게 된다.

단순히 개인의 부귀영화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주기적으로 꾸는 자신의 꿈이 끝나는 순간 현실이 바뀔 것을 알기에, 고려가 7백년 후에도 강대국으로 남게 하기 위한 장기적 안목과 노력이 눈물겨울 지경.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작가가 고증을 위해 노력한 흔적이나 개연성을 부여하기 위해 치밀하게 짜놓은 전개가 빛을 발한다.

후반부에서는 고려 사회 전반에 걸쳐 엄청난 발전을 이루어내기 때문에 초반에 볼 수 있었던 긴장감은 좀 덜하지만, 고려가 국제 사회에서 대장 노릇 할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을 보면 대체역사물을 읽는 이유 중의 하나인 대리만족 측면에서는 오히려 더 나을 수도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이라면 과거의 보물을 묻어놔서 현대의 주인공을 부자로 만드는 과정이 좀 매끄럽지 않은 탓에 시간 여행의 오류가 발생하고, 이걸 메꾸기 위해 (소설에서 등장한 대사를 빌리자면) 조건이 매우 잡스러워진 느낌도 있다.

하지만 그런 소소한 점은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대체역사물 중에서는 그야말로 최고라고 꼽을 수 있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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