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 10%, 폭력 90%를 잘 섞은 재료를 영상미로 어디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가를 실험해보는 영화.
동명의 만화를 원작으로 했기 때문에 아무리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고 해도 준 판타지급 영화임은 분명하다.
페르시아군을 중동이 아닌 인도 아프리카 연합군 정도로 묘사한것도 애매하고 (물론 그 당시 페르시아군이 인도 서북부를 비롯해 넓은 지역을 장악하고 오늘날의 유엔군 뺨칠 정도로 다국적군을 긁어모은건 분명하지만 정작 페르시아군은 별로 안보인다는게 아이러니)
크세르크세스의 친위대인 이모탈(=불사신) 부대의 특징인 금은보화로 치장한 창과 갑옷은 어디다 팔아먹고 일본군 닌자부대를 고용했는지도 불만이고
스파르타군의 갑옷은 왜 다 벗겨놓고 반벌거숭이 야만인으로 만들었는지도 난감하지만...
내용에 신경쓰면 참으로 아스트랄한 영화라고밖에 볼 수 없으니 거기엔 신경쓰지 말고 화려한 영상에 주목하며 보는게 관람 포인트일듯.
아울러 여자분이라면 '용케도 저렇게 긁어모았다'싶을 정도로 잘 빠진 남정네들의 몸매 감상 역시 하나의 포인트.
1. 전투의 배경
기원전 500년경 페르시아는 거의 모든 중동 문명지를 통일한 광대한 제국으로 거듭난다. 다리우스는 서쪽으로는 이집트, 동쪽으로는 인도 서북부에 이르는 광대한 페르시아 제국을 통치하는 '왕 중의 왕'으로 등극했다. 그러나 이오니아에서 일어난 반란은 왕의 권위를 실추시켰고 반란군에게 지원군을 보낸 아테네는 다리우스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다리우스는 그때부터 자신의 종에게 매일 저녁 식사를 하기 전에 '아테네를 기억하십시오'라는 말을 세번씩 반복하도록 명령한다) 그러나 히피아스가 이끄는 페르시아의 대군은 마라톤 평야에서 아테네의 장수 밀티아데스에게 대패를 당하고, 다리우스는 자신의 아들, 크세르크세스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기원전 486년 사망한다.
부왕의 복수를 하기 위해 크세르크세스는 다시 대군을 모으기 시작했고 그 결과 이집트에서 인도에 이르는 모든 주에서 어마어마한 군세가 징집된다.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16만명의 인원과 1200여척의 전함, 3000여척의 수송선이 모였다고 한다. 여기에 노예, 인부, 하인, 짐꾼, 상인 등 잡다한 머릿수를 뭉뚱그리면 당시의 계산으로 가히 백만대군이라고 할만한 병력이었다.
2. 전투 경과
스파르타의 함대 사령관인 에우리비아데스가 이끄는 그리스 함대는 폭풍에 휩쓸려 피해를 입은 페르시아 함대를 아르테미시온에서 공격했으나 수세에 몰려 후퇴한다. 페르시아 육상군을 막을 수 있는 저지선은 테르모필라이에 구축되어 있었으나, 이들은 해군보다 더 여건이 나빴다. 페르시아의 백만 대군을 막기 위해 배치된 병사는 - 비록 역사 연구가들 사이에 이견이 있긴 하지만 수천명에 불과했다. 방어선을 지키던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왕에겐 몇천명의 장갑보병만으로 페르시아의 기마병과 궁수와 전투 코끼리와 '이모탈(=불사신)'이라고 불리우는 크세르크세스의 정예 부대를 막아내야 할 임무가 떨어졌다.
테르모필라이 협곡은 마차 두대가 간신히 통과할만큼 좁은 지역이었고, 그리스 중장보병은 페르시아 군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잘 훈련되어있었고, 장비 또한 우수했다. 지형의 이점과 병력의 우수함으로, 레오니다스는 사흘간 페르시아의 전 병력을 테르모필라이에 묶어둘 수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인 밀고자인 에피알테스의 안내로, 페르시아 궁수들은 테르모필라이 위쪽 산길을 통해 그리스 군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승산이 없음을 알게 된 레오니다스 왕은 그리스 연합군을 돌려보내고 스파르타 병력 300명만을 남기고 최후의 결전을 준비한다. (하지만 그들의 노예가 900~1200여명 정도 더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그 당시를 묘사했던 기록에 따르면, 스파르타 병사들은 '칼로, 칼이 부러지면 칼자루로, 칼자루가 부러지면 주먹으로, 팔이 잘리면 이빨로' 최후의 한사람까지 싸웠으며 결국 전멸한다. (하지만 영화와는 달리 레오니다스 왕은 전투 초반에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3. 전투의 여파
테르모필라이 전투는 오늘날까지도 여러 군대의 귀감이 되고 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과 국가를 위한 충성심은 가장 이상적인 군대의 표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략적 관점에서 레오니다스 왕의 선택은 상당한 악수(惡手)였으며, 굳이 치르지 않았어도 좋을 희생이었다. 필사적으로 벌어준 사흘이라는 시간은 이미 육상 전력이 무의미한 형국에는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크세르크세스는 최후 저지선을 뚫고 아테네까지 밀고 들어가 아크로폴리스 결사대를 전멸시켰고, 이는 테르모필라이 전투와 함께 그리스군의 사기를 떨어트리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결국 전쟁은 테미스토클레스의 속임수에 속아넘어간 페르시아 해군이 살라미스 해전에서 궤멸되며 급반전되었지만, 전략적 관점에서는 스파르타군의 희생이 가져다준 이익은 거의 없는 셈이었다.
(물론 그 당시 스파르타의 법에 의하면 '전쟁에 이겨 방패를 들고 돌아오거나, 죽어서 방패 위에 얹혀서 돌아오는' 두가지 갈림길밖에 없었기에 이러한 불필요한 희생이 강요된 것일수도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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