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브로드웨이 하면 많은 사람들이 뮤지컬을 떠올리지만, 정작 뉴욕에서 뉴욕을 배경으로 하는 뮤지컬을 보기란 쉽지 않다. 브로드웨이 42번가나 렌트(Rent) 같은 뮤지컬이 있기는 하지만 이미 막을 내린 지 오래. 그나마 미국을 배경으로 하는 뮤지컬 중에 롱런하는 건 시카고 뿐.
그러다보니 오래간만에 들른 브로드웨이에서, 그것도 브로드웨이 극장에서 킹콩을 공연하는 것을 봤을 때는 이미 TKTS 부스에서 줄을 서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물론 줄서서 기다리는 동안에 주위에서 들리는 '킹콩 별로라더라'라는 수군거림이 불안감을 안겨주긴 했지만 지역 이름 들어간 특산 메뉴만 보면 안 사고는 못 배기는 인간인지라 꿋꿋하게 표를 구매했다.
킹콩의 원작은 누구나가 다 아는 그 영화. 무려 1933년에 처음 만들어진 작품이라 저작권 시효가 만료된 까닭에 유튜브에서 무료로 볼 수 있을 정도로 오래 된 작품이다. 그 이후로도 1976년과 2005년 두 차례에 걸쳐 리메이크작이 나오며 나름 문화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았을 정도. 영화를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이라도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꼭대기에 기어올라가는 거대 고릴라의 모습은 누구나 알고 있으니까.
TKTS 할인 티켓인데도 가장 좋은 자리를 받았다. 이게 한 편으로는 좋기도 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불안하기도 한게, 결국 망작이라 표가 잘 안팔린다는 증거나 다름없기 때문. 전반적인 줄거리는 원작과 크게 다르지 않게 흘러간다. 배우 지망생과 엔터테인먼트 사업가가 영화를 찍기 위해 해골섬을 방문하고, 여기서 거대 괴수 고릴라를 발견하곤 마취탄을 이용해서 뉴욕으로 잡아온다. 겨우 포획해서 무대 위로 올리는 데는 성공했지만 막강한 괴력을 지닌 킹콩은 결국 탈출하고, 뉴욕의 고층 건물 꼭대기에서 포효하다가 비행기의 기총사격 맞고 죽는 그런 이야기.
정치적 평등에 민감한 브로드웨이 답게 뮤지컬 오리지널 캐스트는 흑인 여성이 주연을 맡기도 하고, 그 역할도 단순히 수동적으로 킹콩에게 잡혀가 비명만 지르는 미녀가 아니라 나름 교감도 하고 자기 주장 뚜렷한 캐릭터를 만들려는 듯 했으나... 개인적인 소감이라면 '그냥 차라리 비명이나 지르는 게 낫겠다. 어설프게 포효하지 말고'라는 느낌. 어찌보면 케이티 페리의 뮤직 비디오에서 힌트를 얻은 것 같기도 한데, 강한 여성상을 연기하는 건 역시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만 여실히 보여준다.
하지만 킹콩에서 가장 중요한 건 역시 킹콩. 줄거리나 배우의 연기력이 다 무슨 소용인가. 여기 앉은 사람들은 다들 거대 고릴라 괴수를 보러 온 것을. 수 백억 원을 쏟아부어 제작한, 거의 1톤에 가까운 킹콩이 무대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에는 관객들 모두 영화 속에서 킹콩을 처음 본 구경꾼들이 보여줬던 표정을 그대로 보여준다. 특히 중간에 킹콩이 무대의 가장 끄트머리까지 천천히 걸어나오는 부분에서는 그야말로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압도되는 수준.
전체적으로 보자면 굉장히 못 만든 뮤지컬임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이게 어쩔 수 없는 게, 가장 중요한 등장인물(?)인 킹콩의 대사나 노래가 없으니 구조적으로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들 수밖에. 그렇다고 여배우가 소화하는 넘버가 압도적으로 뛰어난 것도 아니고. 무대 장치에 돈 많이 쏟아부은 티는 나는데 그걸 써먹을만한 장면이 별로 없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킹콩이 로봇으로 태어나기에는 너무 빠른 동시에 너무 늦은 시대인 탓도 있다. "아, 기술이 벌써 여기까지 발전했구나!"의 탄성과 "아, 기술이 아직 여기까지구나"의 아쉬움이 교차한달까. 로봇의 표정이 변하면서 만들어 내는 감정 표현이나 전체적인 움직임 등은 굉장하지만, 팔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어서 항상 대여섯 명의 출연진이 도와줘야 하는 모습은 마치 병원에서 주변 사람들의 부축을 받아 움직이는 환자를 연상시킨다. 게다가 빠른 움직임을 보여줘야 하는 격투 장면이나 달리는 장면 역시 기술의 부족으로 인해 로봇이 움직이지 못하고 조명과 백스크린을 이용해 꼼수를 쓰면서 그 아쉬움이 더해진다.
만약 좀 더 예전에 이런 수준의 로봇이 나타났다면 사람들은 공연 내용이야 어찌되었건 과학 기술이 만들어 낸 경이로움에 감탄을 거듭했겠지만, 이미 영화를 비롯한 각종 매체를 통해 특수효과에 익숙해질대로 익숙해진 사람들에게는 그 충격이 러닝타임 내내 지속되기한 힘든 법. 만약 좀 더 나중에 개봉했다면 지금 개발중인 여러 기술들을 차용해서 영화를 방불케하는 액션 장면도 소화할 수 있었을테고.
전체적으로 보자면 그렇게 나쁘지 않은 쇼. 킹콩 뿐만 아니라 무대 장치에 돈을 쏟아부어서 그런지 눈이 심심할 일은 그닥 많지 않다. 하지만 엉성한 전개나 뮤지컬의 특색을 살리지 못한 구성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혹평을 면치 못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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