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Read/무협&판타지

판타지소설 리뷰: 신비의 제왕

by nitro 2021. 4. 7.
728x90

현실감있는 마법 전투라고 하면 굉장히 모순되는 것처럼 들린다.

'마법 자체가 허구인 판에 현실감이라니? 박진감이라면 모를까'라는 생각이 절로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컬트를 좀 진지하게 판 사람이 넘쳐나는 서양에서는 저주 등을 통해 상대방에게 해를 끼치는 마법 전투가 꽤나 자주 일어났던 것 역시 사실이다.

물론 이게 실제로 효과가 있었는지는 별개의 문제이지만, 나이 꽤나 들었을 뿐 아니라 사회적 지위와 재산도 많은 신사들이 진지하게 주문을 외우며 상대를 파멸시키려고 했던 것은 분명하다.

대표적인 사례로 온갖 픽션에 흑막으로 등장하는 프리메이슨도 있고, 히틀러의 아넨에르베 정도 되면 거의 해리포터 뺨치는 수준.

그러다보니 무조건 불덩이 쏘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마법이 아니라 명상과 유체 이탈을 통해 비밀을 엿보고 타로 카드로 점을 치며 부적을 써서 적들의 정신에 간섭하는 나름 현실적인 마법 전투를 그려낸 소설도 독특한 매력을 갖는다.

이 소설, 신비의 제왕 역시 마찬가지. 

평범한 키보드 워리어였던 민석은 운수를 좋게 만들어준다는 신비의 고대 중국 의식, '운수 대통 의식'을 치르고 정신을 잃는다.

그리고 깨어난 곳은 로엔 왕국의 역사학과 학생이자 지금 막 자살했던 클레인 모레티의 몸 속.

이세계라고 하지만 오크와 엘프가 돌아다니며 불과 얼음의 마법을 펑펑 써대는 이세계는 아니다.

가스등과 노면전차가 널리 쓰이는, 산업혁명이 한창이었던 유럽과도 비슷한 분위기의 세계.

다른 점이라면 초현실적 존재들이 각종 범죄를 저지르고, 종교 단체의 수호자들이 이에 맞서 싸우고 있다는 것.

하지만 그렇다고 본격적인 초능력자 배틀물은 아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부적과 점술, 유체이탈 등의 '현실적인' 마법에 약간의 양념을 가미한 수준. 

"짧은 초의 겉면은 꼭 사람의 가죽으로 둘러싸인 것 같았고 그 위에는 여러 개의 혹이 나 있었다. 또한 손가락만한 길이의 새카만 심지에는 비늘같은 세밀한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영성으로 불을 붙이게"

우트라브스키는 그 기이한 초를 클레인에게 건네며 말했다. 클레인은 곧장 상대의 말에 따르는 대신, 성냥갑에서 몇 개의 성냥을 꺼낸 뒤 성냥갑만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는 꺼낸 성냥들에 불을 붙였다가 끈 후, 불이 꺼진 성냥들을 교회당의 구석구석에 던졌다. 그 후 그는 종이 인형과 쪽지, 길게 자른 종이 띠, 그리고 구리 호각과 각종 부적의 위치를 조정했다.

예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상황에 대한 준비였다.

모든 준비를 마친 클레인은 손가락을 튕겨 소리를 내면서 손가락 끝에 옅은 남색의 불꽃을 소환했다. 손가락 끝을 심지에 가져다 대자, 새카만 심지에서 밝은 불이 피어올랐다. 사방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지 않은 것 같았지만, 클레인은 자신이 영혼 세계에 진입했음을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중략)

클레인은 긴 종이 띠 하나를 뽑아낸 뒤, 그것을 단단하고 예리한 지팡이로 바꾸었다. 그리고 그 지팡이를 상대가 착용한 그로인 가드의 옆쪽에 난 틈으로 쑤셔넣었다. 치명적인 일격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클레인은 돌연 간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의 머릿속에는 거대한 검이 아래로 내리꽂힘과 동시에 일어난 빛의 폭풍이 자신을 집어삼키는 장면이 떠오르고 있었다.

'함정이다! 우트라브스키의 함정이야!'

조금의 망설임 없이 앞쪽으로 몸을 날린 클레인은 상대의 두 다리 사이로 빠져나와 그의 뒤쪽으로 도망쳤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작가가 오컬트쪽으로 공부를 꽤나 많이 한 사람이라는 게 느껴진다.

현실에 존재하는 오컬트 지식에 약간의 허구적 장치를 더해 상당히 독특한 세계관을 만들어냈다.

다양한 경로의 초월자 계층과, 더 높은 곳으로 향하기 위해 현재 자신의 클래스를 연기해야 한다는 것 역시 굉장히 흥미로운 장치다.

다만 세계관과 소재빨이 선방을 해서 그렇지 이야기 자체가 엄청나게 흥미진진하고 중독성있는 건 아니고, 무엇보다 오컬트 지식에 기반한 세계관이 아는 사람에게나 재밌지 이런 종류의 이야기에 흥미없는 사람에게는 기존의 판타지보다 스케일이 작은, 김빠진 탄산음료 느낌이 날 수도 있다는 데서 호불호가 갈릴 듯.

게다가 중국어 번역 소설 특유의 번역체가 거슬리는 부분도 간혹 눈에 띈다. 중국 소설 중에도 번역을 엄청 매끄럽게 잘 한 작품들도 많은데, 이 소설은 그냥 평타 수준인듯.

하지만 개인적인 취향에 완전 들어맞는 초현실적 세계관이 너무나 마음에 드는 관계로 별 네개.

총평: ★☆ 스케일은 작지만 그만큼 세세하고 현실적인 마법이 지배하는 독특한 세계관이 매력적인 소설. 오컬트나 신비학에 흥미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호불호가 많이 갈릴 듯.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