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터 / 유즈키 아사코 지음, 권남희 옮김. 이봄 (2021)
여러 모로 뛰어난 미인이라고는 볼 수 없는 30대 중반의 여인, 가지이 마나코.
자신과 함께 지냈던 남자들을 연쇄 살인한 혐의로 수감중인 그녀를, 주간지 기자인 리카가 취재활동을 통해 파악하고 또 그로 인해 내면에 잠재되어있던 자신을 깨닫는다.
여성성이란 무엇인가, 남자들이 원하는 여성상이란 무엇인가, 욕망(그중에서도 특히 식욕)과 사회적 규범이 어떤 식으로 사람을 지배하는가에 대한 질문들이 얽혀가며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여성성, 그리고 남자들이 바라는 여성성의 대립이 얼핏보면 페미니즘 소설이라고 생각하게 만들 수 도 있는데… 글쎄, 개인적인 느낌이라면 페미니즘은 ‘투쟁’의 느낌이 강한 반면, 이 소설에서는 ‘자아 성찰’에 더 가까운지라 약간 방향이 다른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이념적 주제는 소소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감동을 받게 되는 건 역시 본문에 등장하는 여러 음식에 대한 실감나는 묘사와, 여기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인간성과 인생 철학에 대한 통찰이 빛나기 때문이다.
“저기, 지금, 마가린이라고 했어요? 나는 돌아가신 아버지한테 여자는 누구에게나 너그러워야 한다고 배우며 자랐어요. 그러나 용서할 수 없는 것이 두 가지 있어요. 페미니스트와 마가린. 만약 내가 다음에 당신과 얘기한다면, 당신이 절대 마가린을 먹지 않기로 결심했을 때일 거예요. 나는 진짜를 아는 사람하고만 만나고 싶거든요.”
“버터를 한 조각 밥에 올렸다. 금세 쌓이기 십상인 편의점 도시락의 1회용 간장 봉지를 뜯어서 한 방울 떨어뜨렸다. 지시대로 버터가 녹기 전에 밥과 함께 입에 넣었다. 리카의 목 안에서 신기한 바람이 새어나왔다. 차가운 버터가 먼저 입천장에 서늘하게 부딪혔다. 갓 지은 밥과 버터의 대비가 질감, 온도와 함께 선명해졌다. 차가운 버터가 이에 닿았다. 부드럽게, 잇몸에까지 스며들 것 같은 식감이다. 이윽고 그녀의 말대로 녹은 버터가 밥알 사이로 흘러넘쳤다. 정말로 황금빛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맛이었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구수하고 향기로운 큰 파도가 밥에 엉키며, 리카의 몸을 저 너머로 흘러가게 했다.”
“요리책에 소금 적당량이나 소금 약간, 이라고 나오지? 요즘은 그렇게 개인 재량에 맡기는 표기를 하면 항의가 들어온다고 요리책 편집하는 지인이 말해주더라. 뭐랄까, 절대로 실패하고 싶지 않고, 자신의 적당량을 가늠할 자신도 없는 사람이 늘어난 것 같다고 했어. 요리란 시행착오인데 말이야.(중략) 한 가지만으로 배를 채우지 않아도 되고, 모든 것에서 남들 수준을 목표로 하지 않아도 될 텐데 말이야. 각자 자신의 적당량을 즐기고, 인생을 전체적으로 만족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할 텐데.”
“그러려면 자신의 적당량을 모르면 안되겠지.”
“그러게. 그래서 다양한 음식을 많이 먹고 자신에게 맞는 맛과 양을 찾아야 할지도.”
“직업이나 나이, 결혼 여부, 아이가 있는가 없는가, 그런 건 우리 전혀 몰라요. 직장은 고사하고 이름도, 정말로 성을 뺀 이름밖에 몰랐어요. 아는 것은 각자 좋아하는 식재료와 싫어하는 식재료, 나페가 가능한가, 프랑스에 치즈 여행을 가보았는가, 어느 백화점 지하 매장을 좋아하는가, 식탁을 꾸밀 때 참고하는 영화는 무엇인가. 그런 게 우리한테는 무엇보다 소중한 프로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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