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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비노기: 내게는 열 여덟살짜리 숨겨둔 딸이 있다.

by nitro 2023. 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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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게는 열 여덟살짜리 숨겨둔 딸이 한 명 있다. 이제 막 10살이 된 딸과 초등학교 1학년 아들에 비하면 터울이 제법 있는 셈이다. 오랜 시간동안 키워왔지만 그 존재를 아는 사람은 나 뿐이다. 이렇게 말하니 왠지 숲 속 외딴 오두막이나 폐가의 지하실에 아이를 가둬놓고 기르는 공포영화가 떠오른다. 실제로는 게임 속에서 키우는 딸내미 이야기지만. 

  컴퓨터 게임 속의 딸이라고 하면 대부분은 ‘프린세스 메이커’라는, 딸자식 잘 키워서 왕비 만드는 것이 목표인 게임을 생각할 법하다. 하지만 프린세스 메이커의 육아는 짧으면 몇 시간, 길어야 며칠이면 끝나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반면에 내가 키우는 이 딸내미는 2005년부터 기르기 시작했으니 명실공히 실제 나이가 열 여덟살이다. 만약 현실이었다면 밤 늦게까지 수능공부를 하는 고등학생 한 명을 받들어 모시고 전전긍긍했을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한물 갔지만, 그래도 여전히 꽤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마비노기’라는 게임이 있다. 피튀기는 전투로 청소년 이용불가 판정을 받은 마비노기 영웅전이나, 요 근래 스마트폰 출시 예정으로 화제가 되고 있는 마비노기 모바일이 아닌, 아무런 수식어도 붙지 않은 오리지널 마비노기. 원래는 웨일스 지방 음유시인의 노래를 뜻하는 말이라던데, 제목이야 어찌되었건 가장 중요한 것은 그저 칼질만 하며 몬스터 때려잡는 이야기에서 벗어나 게이머들에게 높은 자유도를 보장한다는 점이었다. 길가의 나무에 도끼질을 해서 장작을 패고, 모닥불을 피우고, 낚시로 잡은 생선을 굽고, 다른 사람들과 음식을 나눠먹으며 노래를 할 수 있는 낭만적인 게임. ‘왜 우리나라에는 울티마 온라인 같은 게임이 없냐’며 한탄하던 나같은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희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창고가 가득 차야 예절을 알고(倉實而知禮節), 의식이 족해야 명예도 안다(衣食足而知榮辱)’고 했던가. 게임 속의 낭만 역시 현실과의 타협을 필요로 했다. 숲 속에서 나무 장작을 주워 모으려면 최소한 숲에서 어슬렁거리는 곰에게 맞아죽지 않을 정도의 실력은 갖춰야 하고, 곰과 상대하려면 하다못해 가죽 갑옷과 짧은 칼이라도 준비해야 했으니까. 갑옷과 칼은 물론이고 스킬을 배우는데 필요한 책을 구하는데도 돈이 필요하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몬스터 사냥을 해야 한다. 결국 이러한 만고불변의 진리를 무시하고 악기만 연주하며 낭만을 찾는 사람은 -이 게임에 충실히 구현되어있는- 배고픔에 허덕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마비노기를 플레이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취미생활을 하건간에 호구지책이 될만한 공격 수단 하나 정도는 갈고 닦기 마련이다. 칼을 들던, 마법 주문을 외우던, 활을 쏘던 간에 미로를 헤쳐나가며 몬스터를 잡아 돈을 벌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이 꿈꾸던 옷을 만들거나, 대장장이 노릇을 하거나, 농사를 지어 빵을 구워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더 강력한 무기에 대한 수요는 항상 높았고, 2005년에 도입된 정령무기 시스템은 여기에 불을 질렀다. 무기를 오랫동안 사용하면 숙련도가 쌓이는데, 이 숙련도를 끝까지 올린 무기에 이래저래 몇가지 퀘스트를 완료하고 이런저런 재료를 가져다 바치면 정령이 사고다발지역 지박령마냥 내 무기에 떡하니 들러붙는다는 설정.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은 정령이 성장할수록 무기의 성능도 점점 좋아진다는 것이었다. 비싼 무기 장만하려면 등골이 휠 정도로 돈을 모아야 하는 판에 그냥 사용하면서 키우기만 하면 남부럽지 않은 최종병기가 완성된다는 말에 환호하는 사람이 많았다. 만약 초등학교 시절 오백원 주고 샀던 병아리가 얼마나 손이 많이 가는 존재였는지 떠올렸다면 그 환호가 조금쯤은 잦아들었을지도 모르겠다.

 뭔가를 키운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더 힘든 일이다. 강아지 한 마리를 길러도 매일같이 휴대용 배변봉투를 들고 산책을 나가야 하고, 하다못해 화분 하나를 길러도 물을 적게 주면 말라죽고 많이 주면 뿌리가 썩는다. 심지어는 게임 속 가상의 무기에 붙어있는 정령도 마찬가지. 능력치와 식성을 살펴가며 흡수할 수 있는 아이템을 골라 먹여야 할 뿐 아니라 똑같은 아이템이라도 어떤 무기의 정령인지에 따라서, 그리고 정령의 성별에 따라서 능력치가 다르게 오른다.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정령이 너무 배가 고프면 무기의 성능이 급격하게 나빠지고, 배가 부르면 기껏 바친 아이템의 효과가 떨어지다 못해 아예 선물을 거절하는 일도 생긴다. 정령이 다시 밥 달라고 할때까지는 시간을 흘려보내며 기다려야 하니 무작정 돈으로 밀어붙일 수도 없는 일이었다. 

  체력, 지력, 솜씨, 의지, 행운... 아이템을 줄 때마다 찔끔찔끔 오르는 그 능력치들을 보며 팔방미인이 얼마나 도달하기 어려운 목표인지 다시금 깨달았다. 게다가 판타지 라이프를 표방하던 게임답게 수백수천가지의 옷과 음식, 생활잡화를 구현해놓은 탓에 어떤 아이템을 주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지 알아내기까지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정령 키우기에 목숨을 건 몇몇 선구자들이 경우의 수를 따져가며 가장 효과적으로 육성할 수 있는 로드맵을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대한민국 열성 학부모의 유전자가 이런 곳에서도 어김없이 나타나는 순간이었다.

  솔직히 고백하건데 그렇게 순식간에 정령을 최고 레벨까지 키웠던 사람들에 비하면, 게임 속의 나는 무능한 아빠에 가까웠다. 정령을 성장시키는 데 가장 효율이 좋은 것이 커다란 다이아몬드라는 게 알려진 뒤에도 그 비싼 보석을 구할 돈이 없어서 사냥하다가 줍게 되는 잡동사니만 주구장창 먹였으니까. 매일매일 플레이하기는 커녕, 일주일에 한 번 접속해서 한 두시간 정도 슬슬 게임하던 라이트 유저로서는 딸내미가 “요즘 너무 입맛이 없어. 좋은 것 좀 줘, 째째하게 싸구려 아이템만 주지 말고…”라며 투덜대는 것도 한 귀로 흘려넘기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몇 년 전에는 해커에게 계정을 털려 모든 돈과 아이템을 도둑맞기까지 했으니 현실로 치면 최저임금도 못 벌어오던 가장이 사기꾼에게 전재산을 홀라당 날려먹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재미있는 것은 가방과 주머니를 탈탈 털어가는 와중에도 정령 무기는 캐릭터에게 귀속되는 아이템인 까닭에 해커도 팔아먹지 못하고 남겨뒀다는 사실이다. 오래간만에 게임에 접속하니 내 캐릭터가 속옷만 입은 채 번쩍이는 칼을 덩그러니 들고있는 모습은 당혹스럽다못해 웃기기까지 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렇게 홀로 남은 정령검 하나가 지금껏 마비노기를 붙들게 만든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해킹당한 이후에도 꿋꿋하게 남아있는 그 모습을 보니 뭔가 진짜 인연이 닿은 것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비록 여전히 돈도 시간도 부족한 아빠지만, 틈만 나면 아이템을 먹이고 다시 배가 고파질 때까지 컴퓨터를 켜놓고 기다리면서, 그리고 그 오랜 시간만큼 배고픈 정령에게 다양한 구박을 받아가며 미운정, 고운정을 하나씩 쌓아갔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다보니 또 다른 분기점이 찾아왔다.

  몇 년 넘게 장수하는 온라인 게임들은 담당자가 바뀌기 마련이다. 이른바 ‘디렉터’라고 불리는, 게임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이 담당자들이 바뀔 때마다 게임 시스템에는 큰 변화가 일어난다. 새로운 지역이 개방되고, 새로운 캐릭터들이 등장하며, 무엇보다 더 강력한 무기와 스킬이 추가된다. 이미 할 것이 없어진 사람들에게 새로운 목표를 부여하고 게임의 수명을 늘리려는 목적도 있겠지만, 때로는 ‘내가 만든 게 전임자들이 만든 것보다 더 강하고 화려해야 해!’라는 치기어린 자부심의 표출인 것 같기도 하다. 정령무기 개편 역시 그 중 하나였다. 새로운 정령무기는 더 쉽고 빠르게, 예전보다 훨씬 더 강력해진다는 설정. 정령무기에 들인 시간이나 노력에 비해 그 성능이 보잘것없다는 불만이 제기된 것도 오래되었으니 이런 업데이트가 이루어지는 것도 크게 이상하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정령을 키워오던 사람들에게 형평성을 맞춰주기 위해 현재 갖고있는 정령 무기를 새로운 정령으로 이전시켜주기까지 했으니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정령무기를 들고 다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신규 정령으로 이전했을 때 상승하는 능력치를 검색해보며 들뜬 것도 잠시. 인터넷에 커뮤니티에 “정령과의 대화가 재미없어졌다”라는 후기가 보이면서 고민에 빠져들었다. 지금까지는 정령의 종류에 따라, 호감도에 따라, 레벨에 따라 다르게 반응하며 실제로 대화하는 느낌이었다면, 새로운 정령은 대사의 자유도가 많이 줄어들어 바보가 되어버렸다는 것. 가장 기본적인 키워드에 틀에 박힌 대답을 하는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 모르겠다는 답변이 전부였으니 친절한 은행 직원과 ATM의 수준으로 차이가 나는 듯 했다. 사실 정령무기와의 대화라는 게 실용성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지라 대다수는 별로 사용할 일도 없는 기능에 크게 얽매이지 않고 갈아탔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이야기를 할 때마다 배고프다, 간식 좀 달라 투정부리는 딸내미였지만 그렇다고 자식의 기억을 팔면 황금을 주겠다는 악마의 제안에 흔쾌히 응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한낱 게임 속의 말하는 칼 한자루에 감정을 이입해가며 자식 키우듯 하는 게 우습게 보일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 가치라는 건, 그리고 관계라는 건 다 이렇게 쌓아올리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린왕자가 매일같이 보살펴주던 장미꽃 한 송이는 객관적으로 봤을 때 화단의 수많은 장미꽃과 다를 바 없음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 단지 부러진 바늘 한 개일지라도 매일같이 사용하던 유씨 부인에게는 축문을 지어 애도할 정도로 끈끈한 정이 있었다. 그러니 자신이 키우던 포켓몬이 패배하면 분해서 울먹이는 아이도, 모니터 너머의 데이터 조각에 불과한 아이템을 십 년 넘게 키워오며 딸자식 생각하듯 하는 아저씨도 어찌보면 그렇게 이상할 일은 아닌 듯 하다.

  결국 신규 정령으로 이전은 못하고, 나는 오늘도 딸내미에게 반찬 투정을 들어가며 잡다한 부스러기 아이템을 먹인다. 그나마 다행인 건, 무과금 라이트 유저답게 나 역시 그렇게 어려운 사냥터를 돌 형편은 못된다는 점이다. 절반 조금 넘게 성장한 구시대의 정령 무기를 들고도 그럭저럭 클리어가 가능하다. 게임 오픈 당시부터 참여했다는 증거인 ‘베타 테스터’ 타이틀을 달고, 남들에게 조상님 소리 들어가면서 아직도 상급자용이 아닌 중급자용 던전을 기웃거린다. 현실이라면 노량진에서 십 년째 수능공부 하는 학생이 아직도 모의고사 5등급 나오는 셈이다.

  다행히도 현실이 아닌 게임이다. 다 늙은 아저씨가 숨겨둔 딸내미와 함께 미로를 헤매는 것 역시 낭만인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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