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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소설이 요즘 뜬다는 말이 있지만, 내가 좋아하는 일본 소설가는 그다지 많지 않다. 어떤 장르가 되었건 일본 소설은 대다수가 그 특유의 음울한 분위기를 떨쳐내는 물건이 별로 없는지라, 어쩐지 기운빠지고 어둑어둑한 느낌이 항상 남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분위기도 좋게 말하면 비판적이고 독특한 느낌인데다, 요즘 세상이 세상인만큼 시니컬하고 니힐한 내용을 원하는 독자들에게는 일본 소설이야말로 취향에 딱 맞는 물건 찾아내기 좋은 바다일수도 있다.
하지만 가볍게 웃을만한 내용을 찾기엔 상당히 무리인 바닥이기도 하다. 한국식 웃음은 짧고 강렬하게, 그리고 뒷맛은 길게. 라고 한다면 일본식 웃음은 술에 물탄듯 물에 술탄듯 어찌보면 지루한 가운데 맥이 빠진 웃음기만 흥건한 경우가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다 읽고 나서도 '뭘 읽었는지 모르겠다', '남는게 없다'는 감상이 대부분이고, 깊은 생각이나 감동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아, 재미있었다'정도의 여운을 남기는 소설도 찾기가 힘든게 일본 소설계다. 기껏해야 '도쿠가와 이에야스'같은 역사소설이나 '은하영웅전설'같은 판타지 소설쪽의 책들만 기억이 날 뿐, 바나나 하면 과일밖에 안떠오르고, 가오리 하면 생선밖에 안떠오르고, 무라카미와 무라카미는 항상 헷갈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 취향에 딱 맞는 소설도 간혹 나타나긴 하니, '번쩍번쩍 의리통신' 역시 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짧게 끊어치면서도 잘 이어지는 전개, 무겁지 않은 내용, 하지만 받아들이기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주제, 곳곳에서 이어지는 유머.
어쩌면 이 '가볍지만 천박하지 않고, 무겁지만 거만하지 않은' 무게가 내 취향에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아사다 지로의 대표작인 '철도원' 보다도 '프리즌 호텔'쪽이 마음에 든건 당연한 이야기일까)
물론 이 소설을 깊이있게 받아들이려면 일본식 '의리', 좀 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의협, 또는 사무라이정신에 대한 이해가 되어야 하고, '결과야 어찌되었건 그 뜻을 숭상한다'는 일본식 이상주의 역시 이해해야 한다. 제목인 '의리통신' 자체가 소설에 등장하는 야쿠자 잡지의 제목이기 때문이다. 자위대 해외파병을 반대하며 사단사령부로 쳐들어가 자결을 시도하는 군인이나, '이 총이라도 팔아(서 쌀이라도 사)와라'라는 오야붕의 말을 잘못 이해하고 단신으로 상대 조직에 쳐들어가 쑥밭을 만들어놓은 야쿠자, 혹은 유력 정치인에게 속아 그 죄를 대신 뒤집어쓴 관리의 행동이 모두 이러한 '의리'의 범주에 들어간다. 그러다보면 우리나라 사람들 입장에서 볼땐 껄끄러운, '야스쿠니 신사'나 '사이고 타카모리'의 이야기도 등장하기 마련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쩍번쩍 의리통신'은 극우의 느낌이 들지 않는다. 사당에 사이고 타카모리(정한론을 주장한 일본의 정치가)의 동상 대신 사이고 테루히코(일본의 아이돌 가수)의 브로마이드를 걸어놓은 작가의 센스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이 책을 읽다보면 그런 일본식 '의리'라는 것이 약간은 이해가 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일장기를 휘날리며 분위기 살벌하게 대일본제국의 영광을 부르짖는 극우파의 외침이 아니라 '그때는 그랬었지'라며 회상하는 할아버지의 이야기같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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