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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Fiction_소설105

몽환화 몽환화 /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비채 (2014) “탁상 위에는 차가 든 페트병과 찻잔이 놓여 있었는데 방석에 쏟아진 것은 차가 아니라 순수한 물이었다고 하더군요. 물을 쏟은 게 아키야마 씨인지, 아니면 범인인지, 왜 물인지, 모두 불명인 상태입니다.” “커피는 아니다. 차도 아니다. 그럼 무엇을 위해 물을 끓였나. 진상은 매우 단순합니다. 마시기 위한 물입니다. 이른바 백탕이라는 거죠. 아키야마 씨는 차 대신에 백탕을 찻잔에 넣어 마셨습니다. 이는 차를 끊은 사람에게는 매우 일반적인 일입니다.” 백비탕에 대해 알아보다가 백탕이 트릭으로 사용된 추리소설이라고 해서 읽기 시작한 몽환화. 이제는 멸종되어 역사 기록 속에서만 존재하는 신비의 노란색 나팔꽃. 그리고 이 꽃을 길러보려던 노인의 죽.. 2022. 7. 8.
만국과자점 마음가는대로: 무슨 과자든 만들어 드립니다 만국과자점 마음가는대로 / 미조쿠치 사토코 지음, 김현화 옮김. 소미미디어 (2021) 무라사키 소스케가 주인인 ‘만국과자점 마음 가는 대로’는 그 이름에 걸맞게 일본 화과자에서부터 우주식까지 과자라고 이름붙은 것은 다 만드는 가게다. 특히 손님에게 특별 주문이 들어오면 무엇이든 만들어 주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아르바이트생 구미와 함께 다양한 손님들을 만나며 그들의 이야기에 얽힌 과자를 만들어주는 것이 주된 내용. 300페이지짜리 작은 책에 24개의 에피소드가 담겼으니 그야말로 초단편 모음집이라 할 수 있다. 길이도 그렇거니와 이야기의 진행 역시 빈말로도 ‘깊이가 있다’고 할 수준은 아니다. 소설책이 아니라 실화를 바탕으로 한 에세이였다면 또 모를까. 다만 세계 각국의 과자 - 롤케이크나 만주같은 익숙한.. 2022. 6. 14.
낮술 낮술 / 하라다 히카 지음, 김영주 옮김. 문학동네 (2021) “양고기 치즈버거랑 브루클린 라거 1파인트 주세요.” 곧장 주방에서 치익 하고 패티를 굽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감자를 튀기는 소리도. ‘이 소리만으로 한 잔 마시겠어.’ 이혼을 하고 아이와 떨어져 혼자 사는 쇼코. 밤중에 누군가를 지켜봐주는 일을 하며 살기 때문에 저녁식사는 이른 아침이나 한낮에 하게 된다. 일하러 나가는 싱글맘이 아픈 아이가 자는 동안 돌봐달라고 하거나, 혼자서 쓸쓸히 집을 지켜야 하는 애완견과 함께 있어주거나, 잠이 오지 않아 심심한 노인의 이야기 상대가 되어주는 그런 일을 하고 나면 허기가 몰려오는 주인공. 그리고 맛있는 술 한잔 곁들여 식사를 하며 자신이 돌봐준 사람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해 생각한다. 초밥.. 2022. 6. 2.
크리스마스 푸딩의 모험 크리스마스 푸딩의 모험 /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황해선 옮김. 해문출판사 (1989) 정통파 탐정의 한 명인 에르큘 포와로가 나오는 고전 추리소설. 별다른 모험활극 없이 정보를 수집하고 해석하는 것으로 미스테리를 풀어나간다. 사라진 보석과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잘 버무린 단편 소설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은 역시 영국식 정통 크리스마스 푸딩에 관한 이야기들. “정통 영국식 요리는 대륙에 살고 있는 식도락가들도 아주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도 알아두셔야 할 겁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18세기 초에는 런던으로 특별조사단이 파견되기까지 했었는데, 그 조사단은 프랑스에다 영국 푸딩의 놀라움에 대한 보고서를 올렸었습니다. 그 보고서에는 ‘프랑스에는 푸딩과 비교할 만한 음식이 없음. 맛이 뛰어.. 2022. 5. 19.
요리사가 너무 많다 요리사가 너무 많다 / 렉스 스타우트 지음, 이원열 옮김. 문학동네 (1993) 이 소설을 읽고 난 후, 내가 가장 좋아하는 탐정은 네로 울프가 되었다. 의자에 앉아 주어진 정보만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정통파 탐정이지만 전속 요리사를 둘 정도로 미식을 좋아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오만하고 게으른데다 남녀차별주의자라는 성격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만들어내는 독특한 캐릭터가 매력적이다. 그의 조수, 아치 굿윈이 고전적인 왓슨의 역할과 더불어 주로 몸 쓰는 일을 하면서도 그의 고용주와 끝없이 쏟아내는 만담 역시 재미있는 볼거리. 곳곳에서 끼어드는 울프의 (그리고 작가의) 미식관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젊은 날의 저는 오스트리아 정부에서 비밀 임무를 받고 스페인에 가 있었죠. 어떤 남자의 흔적을 따라가다 보니 피.. 2022. 5. 11.
벽장 속의 치요 벽장 속의 치요 / 오기와라 히로시 지음, 신유희 옮김. 위즈덤하우스 (2007) 약간 호러 느낌이 나는 서스펜스 스릴러 단편 소설들. 소설마다 방향이 좀 바뀌는데, 유령이나 살인사건 등을 기본으로 깔고 가면서 서정적이거나 블랙 코미디거나 우울하거나 하는 작품만의 색채를 더한다. “콘 비프 샌드위치를 먹는 밤”에서 이 책에 수록된 “살인 레시피”에 대한 소개글을 읽고 집어들었는데 전반적으로 모든 소설이 다 괜찮은 느낌이다. 집세가 저렴한 방이 나와서 낼름 들어갔더니 소녀 유령이 나왔는데 사정을 들어보니 불쌍해서 함께 살게 된다던가, 물에 빠져 죽은 친구가 함께 놀자고 불러서 이야기를 나누며 작별한다던가 하는 이야기들. 다만 단편 소설이라 그런가 깊이 몰입하기는 어렵고, 대작이라고 할만한 소설은 아니라는 .. 2022. 5. 6.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한국단편문학선 한국단편문학선1 / 김동인 외 지음, 이남호 엮음. 민음사 (1998) 얼마 전 ‘더블린 사람들’을 읽으며 ‘요즘 한국인들이 겪는 무기력감에 비하면 별 거 아니지’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번에 한국단편문학선을 읽다보니 앞의 요즘이라는 단어는 떼어버려도 되지 않을까 싶다. 일제강점기 전후를 배경으로 우리나라 문인들이 쏟아낸 여러 단편소설들을 보고 있노라면 저절로 속이 깝깝-갑갑도 아니고-해진다. 그나마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김유정의 동백꽃이나 이효석의 모밀꽃 필 무렵 정도가 힐링이라면 힐링일까. 그 외에는 죄다 가난에 찌들고 나라 빼앗긴 이등 국민의 설움에 버무려져서 무력감과 비굴함이 뚝뚝 묻어난다. 재밌는 사실은 학교 다니며 교과서에 나온 글을 낱낱이 분석해가며 읽을 때는 별로 느껴지지 않았던 재미가 지금에 .. 2022. 4. 26.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 1.김 부장 편 / 송희구 지음. 서삼독 (2021) “여보, 아들 들어오기 전에 말해야겠어. 나 공장으로 발령났어. (중략) 공장에서 제일 중요한 팀으로 가는 거야. 공장이 요새 좀 어려운가봐.” “당신처럼 유능한 사람을 어려운 곳에 보내서 기사회생 시키려고 그러나 보네. 난세에 영웅 난다는 말도 있잖아.” 김 부장은 잘 넘겼다는 생각을 하며 아내를 바라본다. 역시 아내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여자구나. 아내도 속으로 생각한다. 우리 남편도 때가 왔구나. 마음이 안좋을테니 자세히 묻지 말아야지. 대기업 다니며 빵빵한 연봉 받고, 집값이 두배로 오른 것에 자신감 뿜뿜하던 김 부장. 그런데 알고보니 주변에는 자신보다 더 벌고 더 잘난 놈이 수두룩하고, 결국 지방.. 2022. 2. 23.
민음사 세계문학 전집: 인간의 굴레에서 인간의 굴레에서 (전2권) / 서머싯 몸 지음, 송무 옮김. 민음사 (1998) 내가 이 책을 언제 처음 읽었나 기록을 살펴보니 2008년도에 구입했다. 아마 도서관에서 먼저 읽고는 ‘세상에 이렇게 사람 열받게 만드는 책은 처음이야. 꼭 소장해야 해’라면서 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렇게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 요즘 웹소설식 표현으로 치면 - 고구마를 꾸역꾸역 먹이다못해 암 유발하는 소설이 또 있을까. “해리와 점심을 먹고 왔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랬어?” “토요일에 가는 여행 말예요. 아직 같이 가고 싶은 마음이 변하지 않았으면 같이 갈게요.” 순간 짜릿한 승리의 쾌감이 가슴을 스쳤다. 하지만 그것도 한순간. 곧 의심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돈 때문인가?” 그가 물었다. “얼마간은요.” 그녀는 간.. 2022. 2. 18.
민음사 세계문학 전집: 문학이란 무엇인가 문학이란 무엇인가 / 장 폴 사르트르 지음, 정명환 옮김. 민음사 (2017) 글 쓰는 게 직업이라고 당당히 내놓고 말하기엔 뭣하지만, 그래도 일단은 키보드로 밥벌어먹고 사는 입장에서는 문학이 무엇인지에 대해 얕게나마 고민해본 기억이 없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글쓰기라는 게 그렇게 얕은 고민으로도 파악할 수 있을만큼 만만한 분야도 아니어서 - 이는 800번대 앞쪽 서가를 가득 채운 글쓰기, 작문 관련 서적들만 봐도 알 수 있다 - 사르트르의 이 책은 꽤나 다양한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물론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문맹률이 높았던 당시 시대상에 비하면 독자를 정의하고 문학의 역할에 대해 고찰한 이 책이 불변의 진리를 담고 있다고 보기엔 어렵다. 그 당시엔 문학을 향유할 수 있었던 계층이란 일종.. 2022. 2. 16.
라면의 황제 라면의 황제 / 김희선 지음. 자음과 모음 (2014) “중요한 것은, 그 즈음부터 인류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혹은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가 대신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에 탐닉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만약 누군가가 세상에서 가장 깨끗하고 건강한 음식을 먹는다면 그의 영혼 역시 세상에서 가장 고결할 것임을, 그리고 그의 지능이나 그의 미래, 그 밖의 모든 것 역시 완전무결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덕분에 대형 마트의 식료품 코너가 새로운 명상의 장소로 급부상했는데, 그곳에선 남녀노소를 불문한 각양각색의 인간들이 당근이나 브로콜리 같은 걸 손에 든 채 존재에 대한 한없이 깊은 생각에 빠져들곤 했기 때문이다.” 라면이 금지된 미래. 27년 동안 라면만을 먹고 살아온 것으로 기네스북 등재 신청을.. 2022. 2. 15.
달까지 가자 달까지 가자 / 장류진 지음. 창비 (2021) 각 등급의 알파벳은 이런 뜻이었다. Outstanding(특출함), Incredible(뛰어남), Meet requirement(요구 충족), Below requirement(요구 이하), Need supplement(보충 필요).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바꿔 불렀다. 아무래도 이쪽이 훨씬 직관적이었다. O: 오짐, I: 인정, M:무난, B:별로, N:나가. “언니, 그래서 결론이 뭐야? 지금 우리한테 비트코인을 하자는 거야?” “다해야.” 언니가 자세를 낮춰 테이블 건너 앉은 내 쪽으로 몸을 슬쩍 기울이더니, 이렇게 말했다. “넌 내가 그렇게 뻔한 소리를 할 것 같니?” 언니는 이더리움을 하자고 했다. 처음 먹어본 유기농 목장의 우유는 맛도 물론 좋았지만.. 2022. 2.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