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592 낮술 낮술 / 하라다 히카 지음, 김영주 옮김. 문학동네 (2021) “양고기 치즈버거랑 브루클린 라거 1파인트 주세요.” 곧장 주방에서 치익 하고 패티를 굽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감자를 튀기는 소리도. ‘이 소리만으로 한 잔 마시겠어.’ 이혼을 하고 아이와 떨어져 혼자 사는 쇼코. 밤중에 누군가를 지켜봐주는 일을 하며 살기 때문에 저녁식사는 이른 아침이나 한낮에 하게 된다. 일하러 나가는 싱글맘이 아픈 아이가 자는 동안 돌봐달라고 하거나, 혼자서 쓸쓸히 집을 지켜야 하는 애완견과 함께 있어주거나, 잠이 오지 않아 심심한 노인의 이야기 상대가 되어주는 그런 일을 하고 나면 허기가 몰려오는 주인공. 그리고 맛있는 술 한잔 곁들여 식사를 하며 자신이 돌봐준 사람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해 생각한다. 초밥.. 2022. 6. 2. 무협소설 리뷰: 21세기 반로환동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무협소설 속의 주인공들은 흔히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의연한 인물들로 묘사되곤 하지만, 나이를 먹으면 먹어갈수록 피할 수 없는 노화와 죽음의 무게에 짓눌리는 것이 일반적인 사고방식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허풍개 역시 마찬가지다. 플라스틱 비비탄 쪼가리로도 고수들을 점혈할 수 있는 고수이면서도 온종일 수련에 매진한다. “그놈의 수련, 뭐 그리 열심히 하십니까? 이미 고수 중의 고수시라고 들었는데요.” “죽기 싫어서.” “죽기 싫다뇨?” “이대론 늙어 죽잖나. 그게 싫어서 수행하는 거야.” 신선이 되어 불로영생하는 것이 목표인 허풍개. 덕을 많이 쌓은 도사가 할 소리는 아니라지만, 그에게는 그런 착한 일을 하는 것조차 오래 살기 위한 방편에 불과하다. 일제강.. 2022. 5. 31. 크리스마스 푸딩의 모험 크리스마스 푸딩의 모험 /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황해선 옮김. 해문출판사 (1989) 정통파 탐정의 한 명인 에르큘 포와로가 나오는 고전 추리소설. 별다른 모험활극 없이 정보를 수집하고 해석하는 것으로 미스테리를 풀어나간다. 사라진 보석과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잘 버무린 단편 소설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은 역시 영국식 정통 크리스마스 푸딩에 관한 이야기들. “정통 영국식 요리는 대륙에 살고 있는 식도락가들도 아주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도 알아두셔야 할 겁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18세기 초에는 런던으로 특별조사단이 파견되기까지 했었는데, 그 조사단은 프랑스에다 영국 푸딩의 놀라움에 대한 보고서를 올렸었습니다. 그 보고서에는 ‘프랑스에는 푸딩과 비교할 만한 음식이 없음. 맛이 뛰어.. 2022. 5. 19. 문학의 맛, 소설 속 요리들 문학의 맛, 소설 속 요리들 / 다이나 프라이드 지음, 박대진 옮김. 한스미디어 (2015) 책 뒷표지의 소개글에 박찬일 셰프가 “살짝 심술도 난다. 이거, 내가 하고 싶었던 건데…”라는 코멘트를 달았다. 전적으로 공감한다. 이 책의 작가인 다이나 프라이드는 50편의 명작 소설을 골라 그 속에서 음식에 대한 묘사 부분을 발췌했다. 그리고 그에 걸맞는 음식 사진을 찍어 음식 사진과 책 소개서와 잡학 사전의 중간 어디쯤에 위치한 이 책을 만들어냈다. 그 사진 한 장, 한 장이 그야말로 소설을 찢고 현실로 나온 듯 해서 선정된 작품에 대한 저자의 애정을 잘 보여준다. 다른 한편으로는 레시피 정도는 책 말미에 모아서 적어줬어도 좋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소설의 인용문과 50장의 사진만으로 만든 책 치고는 .. 2022. 5. 14. 요리사가 너무 많다 요리사가 너무 많다 / 렉스 스타우트 지음, 이원열 옮김. 문학동네 (1993) 이 소설을 읽고 난 후, 내가 가장 좋아하는 탐정은 네로 울프가 되었다. 의자에 앉아 주어진 정보만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정통파 탐정이지만 전속 요리사를 둘 정도로 미식을 좋아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오만하고 게으른데다 남녀차별주의자라는 성격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만들어내는 독특한 캐릭터가 매력적이다. 그의 조수, 아치 굿윈이 고전적인 왓슨의 역할과 더불어 주로 몸 쓰는 일을 하면서도 그의 고용주와 끝없이 쏟아내는 만담 역시 재미있는 볼거리. 곳곳에서 끼어드는 울프의 (그리고 작가의) 미식관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젊은 날의 저는 오스트리아 정부에서 비밀 임무를 받고 스페인에 가 있었죠. 어떤 남자의 흔적을 따라가다 보니 피.. 2022. 5. 11. 대체역사 판타지 소설 리뷰: 동방의 라스푸틴 #대체역사 #제정러시아 #회귀물 #황녀'들'과 썸도 탑니다 1906년 제정 러시아로 회귀한 주인공. 갖고 있는 것이라곤 책 몇 권과 선물로 구입한 타로 카드 한 벌 뿐. 어설픈 점쟁이로 시작해서 어설픈 의사 노릇을 하다가 라스푸틴의 자리를 꿰어차고 러시아 제국 황실의 권력자로 자리잡는다. 그 후론 무기도 개발하고, 미래 지식을 기반으로 전쟁에서 승리하고, 공산혁명 세력도 때려잡는 일반적인(?) 회귀자 성공루트를 탄다. 다만 다른 평범한 회귀 성공담에 비해 특색있는 것이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제정 러시아라는 배경이 그렇게 많이 다루어지지 않은 탓에 이미 1~2차대전 대체역사물을 많이 본 사람이라도 다른 진영으로 바꿔가며 게임하는 듯한 신선함은 느낄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다른 하나는 할렘 루트나 연애 .. 2022. 5. 6. 벽장 속의 치요 벽장 속의 치요 / 오기와라 히로시 지음, 신유희 옮김. 위즈덤하우스 (2007) 약간 호러 느낌이 나는 서스펜스 스릴러 단편 소설들. 소설마다 방향이 좀 바뀌는데, 유령이나 살인사건 등을 기본으로 깔고 가면서 서정적이거나 블랙 코미디거나 우울하거나 하는 작품만의 색채를 더한다. “콘 비프 샌드위치를 먹는 밤”에서 이 책에 수록된 “살인 레시피”에 대한 소개글을 읽고 집어들었는데 전반적으로 모든 소설이 다 괜찮은 느낌이다. 집세가 저렴한 방이 나와서 낼름 들어갔더니 소녀 유령이 나왔는데 사정을 들어보니 불쌍해서 함께 살게 된다던가, 물에 빠져 죽은 친구가 함께 놀자고 불러서 이야기를 나누며 작별한다던가 하는 이야기들. 다만 단편 소설이라 그런가 깊이 몰입하기는 어렵고, 대작이라고 할만한 소설은 아니라는 .. 2022. 5. 6.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한국단편문학선 한국단편문학선1 / 김동인 외 지음, 이남호 엮음. 민음사 (1998) 얼마 전 ‘더블린 사람들’을 읽으며 ‘요즘 한국인들이 겪는 무기력감에 비하면 별 거 아니지’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번에 한국단편문학선을 읽다보니 앞의 요즘이라는 단어는 떼어버려도 되지 않을까 싶다. 일제강점기 전후를 배경으로 우리나라 문인들이 쏟아낸 여러 단편소설들을 보고 있노라면 저절로 속이 깝깝-갑갑도 아니고-해진다. 그나마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김유정의 동백꽃이나 이효석의 모밀꽃 필 무렵 정도가 힐링이라면 힐링일까. 그 외에는 죄다 가난에 찌들고 나라 빼앗긴 이등 국민의 설움에 버무려져서 무력감과 비굴함이 뚝뚝 묻어난다. 재밌는 사실은 학교 다니며 교과서에 나온 글을 낱낱이 분석해가며 읽을 때는 별로 느껴지지 않았던 재미가 지금에 .. 2022. 4. 26. 혼자의 가정식 혼자의 가정식 / 신미경 지음. 뜻밖 (2019) 현대인이 고기를 너무 많이 먹는다는 건 과학적인 사실이다. 고려해야 하는 경우의 수가 많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봤을 때 큼직한 스테이크 대신 채소를 놓고, 샐러드 놓을 자리에 고기를 썰어놓아야 영양학적 밸런스가 맞는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채식주의자들을 무조건 좋게 볼 수만도 없는게, 채식주의가 자연주의와 결합하면서 종교적 색깔이 가미된 것이 문제다. “설탕은 쓰지 않아! 그 대신 꿀을 써야지!”라거나, 이미 유전자조작과 기업식 농법으로 인해 대자연과는 거리가 먼 농산물을 보며 “이것이 자연의 향기!”라는 반응을 보인다면 지구평면설 신봉론자와 크게 다를 바 없어진다는 거. 물론 그렇게 해서 자신의 정신적 만족을 얻고 신체적으로 더 건강해지면 나쁠 .. 2022. 4. 20. 고전에서 길어올린 한식 이야기 고전에서 길어올린 한식 이야기, 식사 / 황광해 지음. 하빌리스 (2017) 신문기자 출신의 저자가 동아일보에 기고했던 음식 칼럼을 모은 책. 곡식, 고기, 생선, 과채, 향신, 사람의 여섯 가지 주제로 역사에 남겨진 음식 이야기들을 풀어냈다. 음식의 유래나 어원, 잘못 알려진 음식 이야기들에 대해 알 수 있는 자료. 다만 전문 학술서적 수준의 객관성은 없는지라 이 책이 모두 정답이라고 생각하기엔 어렵다. 음식이라는 게 원래 그 명확한 유래를 찾기도 힘들고, 서로 다른 이름을 번갈아 쓰기도 하며, 같은 이름의 음식이라도 지역에 따라 혹은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이 책 안에서도 처음에는 “신선로는 신선과는 관계가 없다. ‘중국에서 건너온 새로운 형태의 그릇’에서 비롯된 표현이.. 2022. 4. 6. 오늘, 우주로 출근합니다 오늘, 우주로 출근합니다 / 마리옹 몽테뉴 지음, 하정희 옮김. BH (2020) 최초의 프랑스인 우주비행사 토마스 페스케의 우주 비행을 다룬 만화책. 책의 부제목인 “놀랍도록 유쾌한 우주비행사의 하루”라는 말이 단순한 수식어가 아니다. 주인공이 우주비행사가 되기까지의, 그리고 되고 나서의 일들을 유쾌하고 재미있게 풀어 나간다. 화장실에 떠다니는 대변 덩어리들을 진공청소기로 흡입해서 정리하는 일부터 ‘인류는 왜 우주로 가는 데 굶어죽는 아이들 수만명을 살릴 수 있는 돈을 퍼붓는가’에 대한 대답까지 이 책 한권에 다 담겨있다. 누구나 한번 정도는 꿈꿔봤을,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정확히 알지 못하는 우주비행사의 삶에 대해 알고 싶다면 한번정도는 꼭 읽어보면 좋을 책. 2022. 3. 31. 크루아상 사러 가는 아침 크루아상 사러 가는 아침 / 필리프 들레름 지음, 고봉만 옮김. 문학과 지성사 (2021) “봉지에서 크루아상 하나를 집어 든다. 따뜻한 기운은 여전한데 반죽은 조금 물러진 것 같다. 차가운 이른 아침을 걸으며, 약간의 식탐도 부리며 먹는 크루아상. 겨울 아침은 당신 몸 안에서 크루아상이 되고, 당신은 크루아상의 오븐과 집과 쉴 곳이 된다. 서서히 발걸음을 앞으로 내디딘다. 당신은 황금빛 햇살을 온몸에 받으며 푸른빛과 잿빛을, 그리고 사라져가는 장밋빛을 가로지른다. 다시 하루가 시작되고 있다. 그러나 어쩌나. 당신은 이미 하루 중 가장 좋은 부분을 먹어버렸으니.” “우리가 원하는 로쿰은 길거리에서 파는 로쿰이다. 가게 진열장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그것은 소박한 피라미드 모양으로 쌓여 있지만, 어찌 보면 .. 2022. 3. 25. 이전 1 ··· 10 11 12 13 14 15 16 ··· 50 다음